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이운경 옮김 / 한문화 펴냄, 2003년

[라포르시안] 지난달에 발칸을 여행하면서 들고 간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발칸 사람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하여 골랐습니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이라고 표시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는 출판사의 의도적인 왜곡이 개입된 것 같다는 생각에 불쾌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책의 기획을 맡아 엮은이로 소개된 영국 킹스대학 철학과의 윌리엄 어윈 교수를 편집대표로 내세웠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윈 교수는 17명의 집필진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 책을 기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의 원고를 썼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책이 소개되어 잘 알려진 지젝을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지젝을 넣어 검색해보면 단독과 공저를 포함하여 무려 55종이나 되는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1949년 유고연방 시절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를 반대하고,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1990년에는 개혁세력을 대표하여 슬로베니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젝은 SF 소설,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영역의 문화 예술을 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비평을 내놓고 있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방문하여 두 차례의 강연회를 가져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고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우선 정치나 철학적 주제는 아무래도 무거워서 여행하면서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반면 말랑해 보이는 문화예술 분야를 철학적 시각으로 분석해본다는 접근방식이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영화 <매트릭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어, 그에 대한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 몫을 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이 장면을 이렇게 처리한 이유가 뭘까 등을 심각하게 생각해가며 영화를 보지는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 와 닿는 대로 느끼는 편이라고 할까요?

오래 전에 동아리선배와 한담을 하다가,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졸업>은 제가 엄청 좋아하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배경에 깔려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졸업 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는 모범생 벤자민(더스틴 호프만粉)이 어머니 친구인 로빈슨(앤 밴크로포트粉)의 유혹으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딸 일레인(캐서린 로스粉)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로빈슨부인이 개입하여 반대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일레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식장을 찾은 벤자민은 교회 2층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일레인을 부르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일레인과 달아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졸업>에 대한 동아리 선배의 말씀은 일레인의 결혼식이 진행될 때, 벤자민이 두드리던 유리창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가르는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저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보았던 것입니다.

최근에 대중가수가 발표한 신곡을 둘러싸고 해석이 왜곡되었다고 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고 ‘정신 나간 괴짜가 맞다’라는 느낌을 적었더니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 너무 치우친 해석’이라는 댓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저의 해석도 다양한 해석의 하나로 보아주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야말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 대중가수의 해석도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혹시 출판사가 노이즈 마케팅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면 그런 상업적 행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 <매트릭스>는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매트릭스>를 보고 그저 화려한 액션장면과 네오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는 컴퓨터 그래픽이 신기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 참여한 열다섯 명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철학적 관점에서 영화 <매트릭스>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형제는 이 영화에 많은 철학적 주제를 짜 넣었다고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논의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영화를 만든 작가와 예술가들이 의도한 의미들을 그저 전달하는 것에만 그쳤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윌리엄 어윈교수는 영화 <매트릭스>를 철학자들의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로 이용해보려 했다고 합니다. 이 검사는 스위스 정신의학자 로르샤흐가 고안한 심리검사로 ‘좌우 대칭의 불규칙한 잉크 무늬가 어떠한 모양으로 보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신 상태, 무의식적 욕망 따위를 판단하는 인격 진단 검사법(네이버 사전)’입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 불교, 허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각자의 관심 분야의 틀을 가지고 이 영화를 읽어 냈습니다. 철학자들이 <매트릭스>와 같은 대중문화의 산물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놀음을 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철학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중문화를 매개로 하여 철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애처롭게(?) 보이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윌리, 너는 왜 은행을 털지?’라는 질문을 받은 전설적인 마피아 윌리 서튼이 ‘그곳에 돈이 있으니까.’라고 답변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앞서 소개해드린 동아리 선배처럼 영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의미를 잡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길까 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분석하기 위하여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니체, 사르트르, 셀라스, 노지크, 보드리야르, 콰인 등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영화 <매트릭스> 속 한 장면.

영화 <매트릭스>를 해석하는데 있어 얼마나 다양적인 접근이 가능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윌리엄 어윈 교수의 경우는 <매트릭스>가 성서적 비유를 하고 있다고 단정합니다. 1999년 부활절에 영화를 개봉한 것도 의도적인 것이지만, 주인공의 이름 네오 역시 유일신을 의미하는 'The One'의 순서를 거꾸로 한 것이며,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구원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만나게 하는 오러클은 예언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를 노예상태로 제어하고 있는 거대한 음모세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숨어서 거사를 준비하는 장소가 바로 시온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이클 브래리건 교수는 불교의 원리로 <매트릭스>를 들여다봅니다.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거울이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은 그 앞에 있는 사물들을 비춰냅니다. 등장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춰내는 거울이야말로 깨달음의 극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울은 궁극적으로 구속되지 않은 마음, 무심(無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네오가 무심을 터득하는 순간 무한한 능력을 얻는 장면이야말로 불교적 사상이 녹여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네오의 죽음과 소생 역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게 되지만 트리니티의 간곡한 기도가 그를 되살려냅니다. 기독교식으로 해석하면 네오의 소생을 부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네오가 인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예언자가 “아마 너의 다음 생애겠지.”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레고리 바샴 교수는 <매트릭스>가 기독교적 주제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티베트 불교, 선불교, 그노시스주의 등 다양한 종교적 요소들이 혼합된 카페테리아, 즉 다원주의적이기까지 하다고 주장합니다. 전통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격을 부여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역시 인간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폭력도 마다하지 않아서 기독교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는 종교적 다원주의자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자신의 종교적 전통만이 진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만하고 극단적인 우월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는 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에 참여한 철학자들의 관심은 전통적인 관점의 철학에 머물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주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제이슨 홀트교수의 관심은 기계가 과연 영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발전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인공지능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일 것 같습니다. 그런 가능성마저도 외면하고 논의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 홀트교수의 생각입니다. 제가 요즘 즐겨보는 복면가왕처럼 편견을 깨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매트릭스>에서는 마음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나요?’라는 네오의 질문에 모피어스는 ‘육체는 정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육체가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심신일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니얼 버윅교수는 모피어스의 입장을 마음을 설명하는 환원적 유물론, 제거적 유물론, 그리고 이원론의 세 가지 이론 가운데 환원적 유물론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유물론과 이원론을 대비시켰을 때, 유물론자들은 마음을 포함해서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하여 이원론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는 비물질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환원적 유물론은 감각을 통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전자적 신호로 바꾸어 뇌가 해석하고 통합한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거적 유물론에서는 마음의 상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 이원론은 마음이라는 상태는 전형적인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아 물질적인 육체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내세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상태에 대응하는 실재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매트릭스>를 보는 관객들은 매트릭스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의 개연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트릭스>는 묘한 구석이 많은 영화입니다. 분명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관객들은 그 허구에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매트릭스 철학하기>처럼 말입니다. 사라 워드교수는 이를 허구의 역설이라고 설명합니다. 1) 우리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해서만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2) 우리는 허구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우리는 허구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120쪽) 결국 실재(實在)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란을 영화 <매트릭스>를 통하여 느껴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이유로 현실에 대한 시각이 왜곡되는 것이라고 지젝교수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사이버공간이 인간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며, 이는 인류가 세계에 지나치게 개입한 데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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