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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소리] 기억술을 매개로 한 16세기 동서문화 교류사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 주원준 옮김 / 이산 펴냄, 1999년

[라포르시안] <북소리>를 통하여 토니 주트 교수를 여러 번 소개한 것은 근세사에 대한 그의 객관적인 시각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토니 주트는 타계하기 전에 루게릭병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것입니다. <기억의 집>의 서문에 그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루게릭병이 진행되어 사지가 마비되면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는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트 교수는 생각하는 것만큼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어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시간이면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져가는 기억의 편린을 서로 맞추어 갖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는데, 그 때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의식의 흐름에 고랑을 파는 작업으로 비유한 주트교수는 밤새 파놓은 고랑들이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다시 파묻혀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중세 기억술사들의 기억방식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중세의 기억술사들은 보고들은 것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는 것인데, 주트교수는 자신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스위스 빌라르 지방의 작은 마을 체지에르에 있는 살레라는 이름의 가족호텔을 이용하여 정리된 생각들을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주트 교수는 자신이 이용한 기억의 방법을 두어 쪽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역사학자 프랜시스 예이츠가 쓴 르네상스에 관한 에세이들에 멋지게 소개되어 있으며, 조너선 스펜스가 쓴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을 주트교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셈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리치가 설명한 기억술을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마체라타에서 태어난 리치가 1610년 5월 11일 중국의 베이징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행적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까지라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의 신흥강국들이 유럽을 벗어나 아시아로, 아메리카로 세력을 넓히던 대항해시대입니다. 리치가 중국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보면 피렌체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포르투갈의 대학도시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어를 배운 다음 인도의 고아와 코친에서는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말라카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것이 1582년입니다. 다음 해 중국의 자오칭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전교를 시작하여 사오저우, 난창, 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거주허가를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리치가 중국인, 특히 관리들과의 관계를 맺는데 기여했던 것이 바로 기억술이었다고 합니다. 리치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만력제가 다스리던 명나라의 말기입니다. 제국의 말기에 흔히 나타나는 혼탁한 사회상이 노정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명나라 역시 과거에 급제해야 입신양명이 가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둔 식자층이라면 당연히 리치의 기억술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기억술은 리치의 인맥관리에 중요한 기술이었던 셈입니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은 리치의 기억술을 설명하는 ‘궁전짓기’에 이어 리치의 행적을 4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각 시기의 도입부에는 리치가 남긴 성화 넉 점을 담고, 이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넉 점의 그림들은 리치와 친분이 있던 베이징의 출판업자 청다웨가 출간한 중국 서화집 <정씨묵원(程氏墨苑)에 실려 있는 것들입니다. 청다웨는 서양 그림과 로마자를 책에 담고 싶어 리치에게 부탁했던 것이고, 리치는 이를 통하여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 생애의 주요 장면과 성서의 극적인 장면들을 기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리치가 그리고 주석을 달았던 그림들은 갈릴래아 바닷가의 그리스도와 베드로, 엠마오로 가는 그리스도와 두 제자, 주님의 천사 앞에서 눈이 멀어버린 소돔의 남자들, 그리고 아기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그림입니다. 리치는 그림들이 기억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기억의 궁전 자체의 기전을 보강하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고 들은 것이 오래 가지 않거나, 잘 못 기억하고 있어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곤 하는 저로서도 기억술을 습득하여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의 첫 번째 장, ‘궁전짓기’을 특별히 집중하여 읽었습니다. 궁전 짓기, 즉 정확한 위치짓기를 통하여 기억을 훈련한다는 생각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연회가 열린 홀이 갑자기 불어 닥친 강풍에 무너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죽은 사람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시모니데스는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기억해내서 시체를 확인시켜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시모니데스의 기억이 정확하였을까요? 사실 사람의 기억이 저지르는 오류를 지적하는 책들이 많습니다만, 대니얼 L. 샥터교수의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은 읽을 만한 것 같습니다.

시모니데스 이후 기억술은 발전을 거듭하여 리치가 대학에서 공부할 무렵에는 수사학과 윤리학 수업의 기초과정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수사학자 치프리아노 소아레스의 <수사학>은 1570년대 예수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기억술은 모든 웅변의 뿌리, 곧 ‘웅변의 보고’로서, 기억술에 의해서 사물 뿐 아니라 말을 어떻게 정리하고 또 이 기술을 어떻게 말의 ‘무한한 진보’에 이용할 수 있는 지를 기록했다.(25쪽)”라고 정리하였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극적인 다양한 이미지들을 창출하고 그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훈련을 해야 하고, (기억을) 배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는 궁전 같은 건물이나 웅장한 성당 등이 제시되었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억술의 원리는 오늘날에도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의과대학의 해부학 문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3층짜리 생리학건물의 옥상에 있는 ‘두개골 방’에 프랑스 국기 같은 삼색 침대보에 관능적인 여인이 벌거벗고 누워서 작은 손으로 구겨진 100달러짜리 지폐를 수북하게 움켜쥐고 있는 이미지를 배치하고, “손님을 기다리며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게으른 프랑스 매춘부(Lazy French Tart Lying Naked In Anticipation)”이라는 문장을 연관시킵니다. 이 문장에는 두개골의 눈구멍 위를 흐르는 신경의 명칭, 눈물샘(Lacrimal), 앞이마(Frontal), 활차(Trochlear), 외측지(Lateral), 코모양체(Naso ciliary), 내측지(Medial), 외전(Abducens) 신경을 의미하는 두문자를 담고 있습니다. 리치는 중국어로 쓴 <기법>이라는 기억술에 관한 책에서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각각의 장소에 배치하고 일관된 설명을 붙여 기억술을 익힐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6세기 무렵 이와 같은 방식의 기억술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530년대에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라는 사람은 <기술과 학문의 공허와 불확실함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기억술이 날조한 ‘기괴한 이미지’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연스런 기억력이 둔화된다고 말했다.(33쪽)”라고 적었으며,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기억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묘기가 얼핏 보기에는 인상적이기는 하나 광대의 속임수에 불과한 쓸모없는 기술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지난주에 [북소리]에서 소개해드린 세기 히로시의 <나를 위한 교양수업>의 핵심처럼 “얻은 지식들을 횡적으로 연결하여 ‘넓은 시야와 독자적 관점을 얻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기억술로 얻은 지식들은 그저 자기 과시욕을 채우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우편제도가 없던 당시만 해도 멀리 나가있는 사람들이 고향에 소식을 전하려면 오가는 사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소식이 오가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인편이 오가는 중에 죽거나 다칠 수도 있어서 소식이 전해진다는 보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치는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 예수회 분부 등에 소식을 전하거나 전교에 필요한 책이나 물품을 부탁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명대에 이미 중국에는 유대인, 아랍인, 유럽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가지고 온 종교의 의식을 치르는 예배당까지도 짓고 살았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중국인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화를 중국에 소개하였는데, 리치만하더라도 중국의 문헌을 유럽에 번역소개하기도 하였으며, 중국어에 익숙해지면서 유럽의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거나 직접 집필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리치는 예수회의 사제로서 전교를 목적으로 중국에서 살았던 것인데, 특히 자기가 아는 만큼의 서양의 과학지식과 신학상의 수양을 원용하면서 기억술을 이용하여 중국인들의 전통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배제하고 예수교를 믿도록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겠습니다.

리치는 저술을 통하여 중국의 전통종교의 본질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리치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 인간의 영혼이 여러 형태의 동물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윤회설로부터 온 것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은 유럽인들의 도덕적 관념이 방만하던 시기에 고안된 우화적인 교훈에 불과한 것으로 오류로 가득한 윤회설이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가설을 세웠던 것입니다. 리치가 윤회설을 강하게 부정한 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은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는 천지창조의 기본틀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윤회한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리치의 불교관에 대하여 당대의 유학자 위춘시는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 불교를 비난할 만큼 불교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도덕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리치가 불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위춘시는 리치에게 꼭 읽어볼 불교서적 목록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리치는 불교가 십계명의 첫 계명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 지난 2천년에 걸쳐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불교가 과연 중국인들의 도덕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냐고 반문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중국의 지식층들은 리치가 타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궤변만 늘어놓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리치는 자신에 대한 중국 고관들의 비판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중국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덧없으며, 그리스도인만이 내세에서 영원히 환희로 가득 찬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 리치는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기술, 책략, 훈련, 기억술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프리즘, 시계, 성화, 유클리드 기하학, 책자, 만찬, 교부 등을 성모의 성스러운 인도 아래 총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유한한 삶을 신념을 지키며 살아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마테오 리치야 말로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이 절대적 진리였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라포르시안  webmaster@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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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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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환 2017-08-01 00:04:22

    잘 읽었습니다^^.

    기억술 비판에 대한 단락에서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변증법적 전개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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