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 버틀란드 러셀 지음 /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펴냄, 2005년

[라포르시안]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파랑새>는 벨기에 출신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1906년에 발표한 6막 12장의 희곡을 각색한 것입니다. 2년 뒤 <파랑새>는 러시아 연극계의 거장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모스크바 예술 극장 무대에 올려져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현대연기론을 정립하여 연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의 <배우수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파랑새>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 초라한 오두막집에 사는 틸틸과 미틸남매를 찾아온 요술쟁이 할머니는 아픈 딸이 파랑새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남매는 할머니가 건네준 다이아몬드가 달린 마법의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 나섭니다.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미래의 나라’ 등 남매는 사람들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가는 곳마다 우여곡절 끝에 파랑새를 만나게 되지만 파랑새들은 날아가 버리거나, 색깔이 변하거나 심지어는 죽어 버립니다. 결국 남매는 파랑새를 손에 넣지 못하고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남매는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기 집 새장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결국 파랑새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희곡 <파랑새>의 작가 마테를링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사실 철학서 한 장을 번역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파랑새>에는 ‘죽음’, ‘행복’, ‘시간’, ‘운명’ 등이 의인화되어 등장하고, 남매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지하고 탐욕스럽습니다. 게다가 보기에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나무들’과 ‘동물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저자는 <파랑새>에 많은 상징과 비유를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비유 가운데서도 마테를링크가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바로 ‘행복’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소박한 행복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라는 빛의 요정의 말처럼 행복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파랑새를 빌어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오늘 소개하는 책이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정복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물론, 러셀이 생각한 행복의 개념이 한 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도 같이 고민해보는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경은 영국의 모머스셔 트렐렉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인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병사했고 18개월 뒤 아버지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개인교습을 통하여 교육을 받은 러셀경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굳어져 갔으며, 모든 것에 대하여 회의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경험을 통하여 논리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 그는 11살 무렵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지만,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는 증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어야하는 것임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졸업했지만, 졸업 후에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형이상학자 J.M.E.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잠시 관념론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과학적인 세계관이 대체로 옳은 견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3가지 주요목표를 추구했는데, 첫 번 째 목표는 인간지식의 겉치레들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줄이는 것이고, 2번 째 목표는 논리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것이었으며, 3번 째 목표는 논리적 분석이었습니다.(다음 백과사전, ‘러셀’)

그러면 다시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만나보기 위하여 러셀경의 <행복의 정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복>은 크게 ‘행복이 당신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러셀경 답게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행복이 당신을 떠났다’라기 보다는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행복은 파랑새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테니까요.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엔이 전 세계 158개 국가를 상대로 국민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47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1위는 영세중립국 스위스가 차지했다고 하네요(연합뉴스 2015년 4월 24일자 기사, “한국, 행복지수 158개국 중 47위…1위 스위스)” 그런가하면 유럽 신경제재단(NEF)이 148개국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의 결과에서는 부탄이 1위를 차지했는데, 우리나라는  68위에 머물렀습니다. 신경제재단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를 조사한 것과는 달리 유엔은 국내총생산(GDP), 관용의식, 기대수명, 정부와 기업의 부패 지수 등 5개 항목을 0~10점까지 점수를 매겨 합산한 결과입니다. 결국 조사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는 셈인데, 중요한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러셀의 접근 방식은 행복에 관한 파랑새 이론과 흡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이 당신을 떠나간 이유, 즉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아홉 가지나 늘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외부적 요인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논의대상에서 제외한 둔 것은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심리적 치유를 통하여 행복을 되찾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불행은 없는 법. 저자는 끊임없는 경쟁이야말로 불행의 근원적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물론 이어 나오는 단조로운 일상 때문에 불행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경쟁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사람들을 쉽게 지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경쟁이 습관화되면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부분에까지 침투하여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소비되는 재화의 수량이 증가할수록, 그 재화의 추가분에서 얻는 한계 효용은 점점 줄어든다.’라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행복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로 즐거움을 얻게 되었을 때는 같은 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다음번에는 강도가 더 높아지거나 빈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행복에서의 한계효용체감의 문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 버린다. 나는 극단적으로 자극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69쪽)” 결국 적절한 수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경쟁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일종의 연쇄반응인 것입니다. 걱정은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결과적으로는 정신적 피로를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이 가중되다 보면 경쟁 대상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질투는 행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도덕적으로 보나 지적으로 보아 나쁜 버릇입니다. 경쟁상태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축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질투라고 하는 소모적 감정에 빠지지 않는 좋은 방어수단입니다.

불합리한 죄의식 역시 사람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본의 아니게 도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경우 합당한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을 털어내지 못하게 되면 자존감이 손상되고 심하면 절망감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특히 종교인의 경우,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우 심한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변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쏟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피해망상이 심해지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지나친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게 되면 해결방안은 쉽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사람이 느끼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행복 사이에는 중간 상태의 여러 가지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행복은 무엇일까요? “두 종류의 행복은 평범한 것과 엄청난 것, 또는 동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정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156쪽)”라고 변죽을 올리고는 이어서 “두 가지 종류의 행복이 가진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묘사한다면,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허용되는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데 있어 학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열정, 사랑, 노동, 관심, 그리고 노력 등이 행복을 제대로 느끼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하기 위하여 불행의 개인적 요소이면서도 심리적 요인이 아닐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주문합니다. “그것은 바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유지하는 것, 생계유지에 충분한 소득을 유지하는 것, 처자식에 대한 의무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182쪽)” 등입니다.

이 책이 발표된 이후로 벌써 여러 세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관한 저자의 인식은 요즈음 사람들에게 바로 적용해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것입니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차이는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을 정의하면서 사랑에는 일종의 보호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큰 틀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지만, ‘사랑이 소유욕의 위장된 형태인 경우가 많은데, 상대에 대한 걱정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상대방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목적도 있다’라는 견해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그 여자를 지배하게 된다는 견해는 여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신여성으로 남아 있을 경우에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자유 때문에, 여성들은 어머니가 될 각오를 하려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이제는 예전에 부모 노릇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단순한 기쁨은 사라지고 없다(208쪽)”라는 구절을 읽다보면 바로 지금의 시점에 꼭 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가사에 전념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나,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보다 훨씬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최근에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일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저자는 행복이란 마치 무르익은 과일처럼 운 좋게 입안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은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불행의 원인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의 정복>에 담긴 행복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새삼스럽게 재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