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 뤽 페리와 클로드 카플리에 지음 / 이세진 옮김 / 더퀘스트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오랜만에 철학분야의 책을 소개합니다. 2002년부터 장 피에르 라파랭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프랑스 현대철학자 뤽 페리(Luc Ferry)교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입니다. 뤽 페리는 알랭 르노, 질 리포베츠키 등과 같이 루이 알튀세르, 장 보드리야르,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68혁명 세대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소장학자로서 주로 종교와 분리된 인문주의를 주창해 왔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은 철학 강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클로드 카플리에가 묻고 뤽 페리교수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철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진리는 어느 학문의 영역에서도 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는 철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그 변화의 폭이 작은 것 같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눈에 띄게 변하는 변곡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류가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흥미진진한 사연, 그게 바로 철학의 역사다’라고 요약하고 있는 저자들은 역사를 통하여 철학의 흐름이 크게 바뀐 변환점에 따라서 철학의 흐름을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철학의 흐름을 구분하기에 앞서 저자들이 철학에 대하여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근본적인 질문을 내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철학을 무엇에 ‘써먹을’ 수 있나? 아직도 철학이 필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조건이 끊임없는 기술혁신과 경제 전략에 지배당하는 이 시대(하이데거가 말하는 기술시대)에 인간이 바랄만한 ‘목적’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이 ‘수단’만을 불려나가는 이 시대에 철학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6쪽)” 이 질문은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 철학자이자 언론인 장 프랑수아 르벨의 소책자 <왜 철학자들인가?>에서 제기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우선 ‘터무니없다고 할 수만은 없는 답이 존재한다’라고 변죽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합리적 사유라는 완전히 인간적인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하였는데 생각해면 동문서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의 역사를 다섯 시기로 나눈 저자들은 ‘각 시대마다 전에 없던 실존적 관건들이 등장해서 철학자들이 기존에 널리 수용되었던 사상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7쪽)’라고 보았고, 당연히 그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철학자를 앞서 소개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작업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충실히 보여주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확인하면서 더없이 아름다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8쪽)”라고 기대를 부풀리도록 만듭니다. 철학의 역사를 읽어가다 보면 앞서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다섯 시기를 각각 한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다섯 시기를 따라가기 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아 ‘첫머리에’에서 철학의 대모험에 나서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첫머리에’가 이 책의 정수를 요약한 부분이라서 완독이 어려운 분들이라면 이 부분만 읽어도 저자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들은 우선 철학의 정체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즉, ‘철학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뤽 페리는 철학의 정의를 논하는데 있어 우리의 삶이 도덕적 가치와 영적 가치(혹은 실존적 가치)라는 두 가지 가치영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영적 가치라 함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헤겔이 이야기한 ‘영(정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라 함은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하는 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잘사는 삶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가치에 따라 철학을 정의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철학사조들은 예외 없이 ‘좋은 삶’의 문제에서 정점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을 경유하고 신앙에 기대어 잘 살아보자는 것이 종교적 접근입니다. 사실 종교는 인간에게 ‘지고선(至高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시도라고 본다는 점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바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철학이 좋은 삶의 조건을 정의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와 공유할 바가 있지만, 자율적 이성과 명철한 의식으로 그러한 정의에 도달하려는 철학과 신에 기대려하는 종교와는 분명 차별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철학은 종교가 아니라 ‘세속의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삶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인간은) 뭘 하는 게 좋을까’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으로, ‘좋은 삶’이란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죽음,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25쪽)”라고 철학을 정의한다고 읽었습니다.

철학의 역사는 인간으로서 ‘좋은 삶’을 정의하는 방식의 변화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철학이 매달려온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다섯 가지의 대답을 내놓았다고 저자들은 정리합니다. 최초의 대답은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이었고, 두 번째 나온 대답은 유대-그리스도교 원리를 토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답변은 르네상스의 등장과 더불어 인문주의에 기반하여 제시된 것이며, 네 번째 답변은 19세기 들어 부상한 해체의 원리에 기반하여 만들어고, 지금 우리의 시대에 들어 도래한 두 번째 인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의 원리로 도출한 ‘사랑’이 다섯 번째 답변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답변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기존의 답변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이 새로 제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초의 답변,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도출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고대에는 완벽한 삶이란 신적인 존재라야 가능할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는 신화로부터 철학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신들의 조화 속에서 인간들 역시 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신화에서 합리적인 핵심들을 가져와 이론화된 철학적 지식을 만들어냈고, 플라톤은 인간이 경험해온 주요 영역들을 아울러서 처음으로 철학적 인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현상을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우주론을 나름대로는 일관적으로 조화시켜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두려움이 지혜의 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남들을 사랑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삶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5세기 들어 몰락한 그리스 철학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개인적인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시대에 이끌어낸 우주적 조화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성(神性)으로 회귀하는 셈입니다. 나아가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을 통하여 인격화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초기의 모호한 신의 세계와는 차별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3대 유일신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이븐 시나와 아베로에스, 유대교의 마이모니데스, 그리스도교의 토마스 아퀴나스 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으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속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따른 ‘좋은 삶’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그리스 철학보다도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노릇에 머물러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철학은 성서를 설명하고, 교회의 해석과 교호의 중요한 개념들에 주석과 논평을 다는 정도에서, 눈부신 신성,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 그리스도가 즐겨 사용했던 비유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에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삶의 의미를 코스모스나 신성에 두지 않고 인간에게,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방법론적 회의를 사유의 토대로 삼았던 데카르트에 의하여 기초가 탄탄하게 다져졌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던 데카르트는 과거로부터 온 것, 즉 선입견을 버리고 의식 외부 세계의 존재마저도 의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여겨서 내버리고, 그다음에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신념에 남아 있지 않을까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45쪽)”라고 말했습니다.

저자들은 “르네상스시대에 문을 연 인문주의 초기에는 주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근거하여 철학․종교․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고, 그 후 데카르트를 거쳐 계몽주의에 이르렀으며, 칸트가 좀 더 견고한 토대를 닦았고, 마지막으로 헤겔과 마르크스가 집단적 역사의 법칙에 대한 사유를 전개함으로서 토대를 한층 더 넓혔다(164쪽)”라고 이 시기의 철학적 특성을 요약하였습니다. 새로운 철학의 지평에서 좋은 삶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근대 인문주의는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첫째, 이 시각에서는 지식, 문화, 문명화․인간화 교육이 중요하다. 둘째, 문학이나 예술 쪽의 재능 또는 위대한 행위로 역사에 기여한 사람의 삶은 의미가 있다.

근대 인문주의는 인간적인 근거와 목표로 삶의 의미를 고찰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부여하는 획기적인 생각까지 끌어냈는데, 그럼으로 해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 자유와 이성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었다(50쪽)”라고 저자들은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고양된 인간 역시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좋은 삶을 고찰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것이 바로 해체의 원리를 적용하게 된 이유입니다.

해체의 원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동한 인문주의는 19세기에 영국의 민주주의, 프랑스의 공화국 사상 등에 영감을 주었지만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종교나 인문주의의 원리에 기초한 이상들을 끊임없이 해체하려 들었다고 합니다. 즉, 이데올로기의 족쇄에 묶인 인간을 풀어주고 지금까지 간과되거나 짓눌리고 억압당했던 실존을 다양한 차원으로 풀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자들은 그 사상가들 가운데 니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앞서 해체의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사유는 이른바 ‘계보학’, 다시 말해 우상들이 은밀히 전하는 허상들의 숨겨진 뿌리를 파헤치는 학문의 형식을 취합니다(52쪽).” 즉, 그리스의 우주론, 종교가 내세우는 영적인 삶, 계몽적 인문주의가 주장하는 해방된 인간 등을 허무한 것으로 치부한 니체에 따르면 이들은 이상을 명목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현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삶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생의 심오한 가치는 ‘선악을 넘어’ 생의 강렬한 힘에 있다고 믿은 니체철학에서는 우리 안의 다양한 생명력들을 조화시켜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혁명’을 앞세운 두 번째 인문주의 시대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공포, 분노, 억울함 따위와 달리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잇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원리입니다.(64쪽)” 앙리 뒤낭 이후 현대 인도주의의 탄생과 발전에서 가까운 이들을 향한 사랑은 이웃사랑이 아니라 낯선 이까지 포함한다는 뜻에서 새로운 집단적 이상을 낳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새로 등장하는 화두이군요.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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