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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소리] 신학생, 시인, 은행 강도…우리가 모르는 ‘젊은 스탈린’젊은 스탈린 /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 김병화 옮김 / 시공사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1879년 12월 21일 ~ 1953년 3월 5일)은 192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41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한반도를 양분한 것이나, 6.25동란의 발발과정에 간여하였을 것입니다. 스탈린은 서구를 지향한 공업화와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시켜 낙후된 소련의 사회구조를 개조시킴으로써 소련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지만, 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공포정치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소련 사회의 구조개혁의 성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전후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배가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C. 터커가 스탈린을 20세기의 이반 뇌제(雷帝)로 묘사한 것은 25년여에 걸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철권통치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기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젊은 스탈린>의 저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1937~1838년 사이에 소련에서는 대략 150만 명이 총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직접 사형선고장에 서명한 것만도 거의 3만9천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스탈린의 지인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략 2,000만에서 3,000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스탈린을 ‘겨룰 자 없는 정치가, 편집증적인 과대망상가, 히틀러를 제외하고는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참상을 저지른 정신이상의 대가’였다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파국적인 성격은 대체적으로 성격형성기에 문제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출간된 스탈린에 관한 수천 권들의 저서 가운데 젊은 시절을 다룬 것은 극히 희소하다고 합니다.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새로 공개된 그루지아의 기록보관소에서는 ‘(스탈린)의 어린 시절, 혁명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 폭력단의 일원이고, 시인이고, 수습 사제이던 시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혈기방장한 연인의 남자. 또 사생아를 낳게 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저버리는 남자로 살아온 과정에 대해 생생하게 말해줄 새 자료들(11-12쪽)’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젊은 스탈린>에서 기술할 내용은 스탈린의 성장과정에 대한 진짜 기록을 밝히는데 두었다고 했습니다. 스탈린 숭배나 반스탈린 음모론의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은 원본 그대로의 기록을 다루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젊은 스탈린 주변에 모여든 캅카스인 남자들의 폭력성과 부족주의는 라트비아, 폴란드, 유대인 심지어는 러시아인들에 못지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갱들의 전쟁, 부족들 간의 경쟁, 민족학살을 함께 겪고, 동일한 폭력의 문화를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즉 스탈린을 형성한 것은 비참했던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한 것이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소련을 형성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라는 사실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소련의 성립이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였음에도,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유럽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가 프로메테우스의 낭만적 환상과 완고한 역사적 유물론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토니 주트 지음, 재평가 195-196쪽, 열린책들, 2014년).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행태에서 이들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 말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공산당 조직가들이 주도한 반파시즘 시위에서 조직가들은 사람들을 내보내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우게 하고는 자신들은 카페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밖으로 내보내 자신들의 이름으로 죽게 만들고 뒤따르는 이익을 거두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면서 영국사람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토니 주트와 티머니 스나이더 지음, 20세기를 생각한다 113-114쪽, 열린책들, 2015년) 초기의 레닌주의에 매료되었던 지식인들도 1936년 스탈린의 시범재판이나 1939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보고서는 소련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과 레닌의 손에서 왜곡된 마르크스를 구출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이의 연계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러시아혁명은 1905년과 1917년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1905년 굴욕적인 러일전쟁의 패배 이후에 300년 이상 지속된 로마노프왕조의 실정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는데, 평화적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살상하였고, 시위대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으로 맞대응하면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시베리아철도 주변 부대의 부대들이 반기를 들면서 황제는 헌법제정과 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것으로 철도와 군대를 다시 장악하고 혁명을 수습했습니다.

이렇게 구성한 의회도 걸핏하면 해산시키는 등 반동정책이 계속되고,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러시아군이 보여준 무기력함에 더하여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1917년 3월 8일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나고 대다수의 수도경비대가 여기에 동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퇴위를 결정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넘어갔습니다. 이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소비에트는 소련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6월 16일에는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사회혁명당이 최다석을 차지하였고,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습니다. 7월에 케렌스키를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지만, 좌익의 탈퇴로 내분에 빠졌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10월 24~25일(신력 11. 6~7) 사이에 봉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다음백과, 러시아혁명 참조).

▲ 혁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강도를 하던 시절의 스탈린.

다시 <젊은 스탈린>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볼세비키혁명의 과정이나 이념적 배경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스탈린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도 혁명 이전의 행적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스탈린에게 영향을 미친 캅카스의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보았던지 프롤로그에서는 1907년 6월 26일 지금의 그루지아공화국의 수도인 트빌리시의 중앙광장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29살의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강탈한 돈은 레닌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카자크, 은행 직원, 무고한 보행자 등 40여명이 사망했고, 스탈린은 뻔뻔한 은행강도, 살인자, 해적, 방화범 등으로 점철된 경력을 쌓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작은 도시 고리에서 젊은 제화공 베소 주가시빌리와 예카테리나 케케 겔라제 사이에서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스탈린의 두 형은 홍역 등으로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 베소는 알콜중독에 빠졌습니다. 어렸을 적에 소소라고 불렸던 스탈린이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베소는 편집증에 시달리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주교가 되기를 바란 케케는 소소를 성직자의 자녀만 입학할 수 있는 교회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비밀이라고 하네요. 교회학교에서 소소는 공부를 잘하는 합창단 소년인 동시에 길거리의 싸움꾼으로, 반쪽은 옷을 잘 입은 마마보이이며 나머지 반쪽은 부랑아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성과 형편없는 처신, 열정적인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타고난 영리함과 거만함이 교대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신중했지만, 화가 나면 잔인해졌고 마구 욕을 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107쪽)” 다른 사람보다 잃을 것이 없었고 감정적인 애착대상이 별로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전교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인 소소는 그림, 연극, 합창 등 다양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1890년 1월 6일 합창단원들이 교회 밖 행사에 나갔을 때, 통제를 잃은 마차에 소소가 치어 큰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베소가 등장해서 소소를 자신이 일하는 구두공장에 도제로 등록시켰습니다. 물론 케케가 후원자들을 동원하여 소소를 다시 교회학교로 돌려놓을 때까지 힘겹게 일하면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에 헌신한, 스탈린이 직접 노동자로 일한 유일한 경험이라고 합니다. 베소의 납치사건 이후로 소소는 폐렴을 심하게 앓았고, 학교에서도 점점 반항아로 변해갔습니다.

교회학교를 졸업하고 소소는 뛰어난 성적으로 트빌리시의 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 무렵 트빌리시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소소는 금지된 사회주의문헌을 읽는 비밀 독서회에 가입하였고, 결국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봄에는 신학교 밖으로 몰래 나가 철도노동자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낭만적인 시인이었던 스탈린은 ‘반쯤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독실한 광신주의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무렵 형성된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만이 인류를 해방시키고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주도록 역사가 정해 놓았다. 인류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회주의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시련과 고난과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섭리에 따르는 이러한 진보의 핵심은 계급투쟁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곧 일반 대중이다. 그들의 해방은 개인의 자유를 위한 촉매제가 된다(148쪽)”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결국 소소는 신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신학교를 떠난 소소는 기상관측소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급진적인 성향의 동료들을 모아 조직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트빌리시의 헌병대 장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등 직업적인 비밀 투사의 길을 밟아 갑니다. 그리고는 파업을 선동하고 시위와 파괴를 주도하면서 경찰과 헌병대의 감시를 받고, 체포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몸을 피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 이어집니다. 때로는 붙잡혀서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내 탈출해서 다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합니다. 1905년 스탈린은 볼셰비키 당대회에 참석할 캅카스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국의 수도에서 레닌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양쪽 부모가 모두 세습귀족인 레닌은 볼품없이 생겼지만 그의 삶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대한 광신적인 헌신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이때 만난 레닌에 대하여 “‘입만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토록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지성의 힘과 완전한 실용성의 융합이었다.(287쪽)”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이후 스탈린은 레닌에게 경도되어 갔고, 스탈린의 강한 추진력에 매료된 레닌 역시 스탈린을 중시하게 되고 결국에는 후계자로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스탈린 역시 모든 활동의 중심에 레닌을 두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스탈린>을 통해서 저자가 밝히고자한 것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성장배경에 더하여 러시아제국시절부터 운용해온 비밀경찰들의 은밀한 활동으로 어느 조직이나 배신자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단호하게 쳐내는 전략을 구사해야만 했던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탈린의 그런 냉혹한 성격은 수없이 등장하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맺고 상황이 바뀌면 관심을 두지 않은 데서도 읽혀지는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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