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SF소설가, 경희의료원 임상병리사)


늦가을답지 않게 무더운 날이 며칠 이어지더니 간만에 가는 빗줄기가 거리를 적셨다. 1호선 회기역 1번 출구 앞 도로도 비에 젖은 은행잎들이 모자이크를 그려놓았다. 낮 12시 약속인데 회기역에 도착하니 11시 40분이었다. 조금 서둘러 걷다보니 어느 새 경희의료원 앞이다.

약속시간이 되자 잠시 후 병원 안쪽에서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한 남자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제법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사진으로 봤던 김지훈 씨였다. 현재 경희의료원에서 임상병리사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국내 SF소설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참신한 소재 선택과 독특한 플롯 전개는 그만의 전매특허로 평가받고 있다. ‘스키마’, ‘L함수 연산법’, ‘더미’ 등 그가 집필한 SF소설은 국내에서 이미 마니아층이 형성됐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장르 소설 전문 사이트인 ‘문피아’에서의 그의 인기는 거의 교주급이다.

반갑게 다가온 그가 식사 여부를 묻는다. 아직 식전인 그와 함께 경희대 내 커피숍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교정으로 들어오니 가을 빛에 흠뻑 젖은 나뭇잎에 눈이 시원해진다.

선생으로 부를지 작가로 부를지 묻는 기자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그는 멋쩍은 웃음으로 답한다. 약간 날카로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수수한 느낌이다.

빵 3개와 아메리카노, 카페라떼를 각각 앞에 놓고 식사 겸 인터뷰를 시작했다.

92학번인 그는 경력 10년차의 고참 임상병리사다. 임상병리사와 SF소설가라. 왠지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어색한 조합처럼 느껴진다. 그는 테이블의 빵을 들고 천천히 뜯으며 말을 꺼냈다.

“임상병리학은 상당히 전문적인 영역이다. 또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다. SF소설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임상병리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SF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SF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임상병리사란 직업이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나름 자긍심도 가지고 있고 보람도 느낀다. 정교함을 요하는 직업이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검사해야 한다. 때문에 관련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수적이다. 근무 10년차지만 지금도 거의 매일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업무와 관련된 공부를 하다보면 SF소설의 글감이 튀어나온다. 나에게 있어 업무와 소설은 상호보완적이다.”

소설은 인물, 사건, 배경으로 구성된다.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인간을 창조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다보니 인간에 대한 이해는 필수 요소라는 것. 여러 캐릭터마다 각각의 인격을 부여하다보니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글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가?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었나?”

“아마도 임상병리사를 시작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결혼 전 아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다. 작가라고 하면 왠지 특별해 보이지 않나. 감동을 줄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국내 SF소설계에 대한 사명감이 있다. 국내에서 SF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주로 읽히고 있는 SF소설의 대부분은 해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국내 SF소설을 발전시켜 지금과는 반대로 해외에서 우리나라 SF소설을 찾아있게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 그것이 지금 SF소설을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SF소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기획은 어떤 식으로 하는가?”

“예를 들어 작년에 발표한 ‘더미’같은 경우 소재가 식품첨가물이었다. 요즘 아이들 된장국 같은 음식을 잘 못먹는게 사실이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이 지리산 청학동에서 ‘여름 서당’같은 캠프에 참여하는데 반찬이 거의 토종 한국음식이다 보니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애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서구화된 식습관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은 갈수록 심해질 것으로 본다. 이런 상황을 맛에 대한 탐욕으로 생각하고, 식품첨가물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인간성을 포기해가는 과정을 기획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더미’라는 소설이다.”

“‘더미’에 대해 조금만 더 소개해달라.”

“비만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주인공은 비만을 유발하는 ‘레인보 아미노산’이라는 물질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이에 대한 특허권을 지나이라는 그룹에 팔게 되고 지나이 그룹은 이 물질을 가축 사료 보조제로 사용한다. 이것을 먹고 자란 가축들은 갈수록 뚱뚱해지고 맛도 좋아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문제는 이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레인보 아미노산을 아예 식품 첨가제로 만들어서 음식에 사용하게 되고 사람들은 뚱뚱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대용으로 만들어진 게 더미라는 이름의 가축이다.”

목이 마른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더미는 유전자를 조작하고 세포를 배양해서 만든 새로운 생명체이다. 더미는 레인보 아미노산을 사용하긴 하지만 먹어도 뚱뚱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어떤 고기보다 맛이 있어 전세계의 모든 이들이 이 맛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한다. 맛에 열광한 나머지 이토록 맛이 좋은 고기를 먹은 인육은 더 맛있을 것이란 생각에 사람들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뉴타입이라고 부르며 인육을 먹기 시작한다. 레인보가 축적된 인육을 먹으면 지능이 향상되고 수명도 연장된다. 뉴타입은 점점 늘어나고 그만큼 살인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세계 각국은 살인을 막고 뉴타입의 생존을 위해 인간농장을 운영하며 인육을 생산해낸다. 이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은 인육과 똑같은 맛이 나는 새로운 타입의 더미를 개발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1년에 한 권 정도 작품을 발표한다. '더미'를 작년에 발표했으니 시기상으로 후속 작품을 발표할 때가 된 것 같다.

“발표를 앞두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이번에는 현대의학을 다뤄봤다. 입자가속기를 이용해 인간들이 영생을 얻게 되는 내용인데 인간들은 영생을 얻는 대신 인간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 포인트다.”

설명을 듣고 나니 빨리 책을 읽고 싶어진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한 가지 이해가 안되는 게 있었다. 핸드폰이 없다는 것이다.

“매일 일과가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가는 것을 반복한다. 저녁까지 아이들과 놀다가 새벽 한시쯤 되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세시 정도까지 쓰고 나면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출근. 그러다보니 필요가 없다. 급한 전화 같은 경우 낮에는 병원 검사실로 밤에는 아내 핸드폰으로 받으면 된다. 무엇보다 검사실에 있는 장비들은 전파에 상당히 민감하기 때문에 있는 핸드폰도 일하는 도중에는 꺼놔야 한다. 만에 하나 핸드폰의 전파로 인해 검사 장비가 오작동이라도 일으키면 안되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30분.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제 그는 다시 검사실로 복귀해야 한다.

인터뷰를 마치기 직전, 그는 자신의 호칭에 관한 기자의 첫 인사겸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임상병리사는 생각보다 어려운 직업이다. 특히 환자의 혈액을 검사하다보면 신체에 혈액이 튀는 경우도 있고 잘못하면 주사바늘에 찔리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면 행복하다. 사명감을 가지고 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긴장된 생활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소설쓰기를 놓지 못하는 것 같다. 임상병리사와 소설가라는 다른 두 직업이 나에겐 하나의 직업처럼 느껴진다. 임상병리사를 하면서 소설을 계속 쓸 것이기 때문이다.”

<김지훈 작가의 작품 목록>

▲스키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생명체이자 인간과는 전혀 다른 진화 방식을 택한 기생체 '스키마'. 이 스키마가 기생하는 생명체는 상상을 불허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데…▲크레타파크캄캄하고 무거운 과거 위로 평온하고 가벼운 현재를 쌓아 올리려는 남자, 렘지. 모든 것을 가졌으나 하나를 잃고 그 하나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뻔한 남자, 드살보. 인간들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상을 꿈꾸며 동화적인 환상을 완벽한 현실로 이루어 낸 남자, 이드.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가장 저열한 쾌락을 좇다가 환상의 미혹에 붙잡힌 남자, 크리스. 아주 이상해서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더미비만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주인공은 비만을 일으키는 신물질을 찾아낸다. 대기업 지나이 그룹은 신물질을 이용해서 가축사료 보조제와 조미료를 개발한다. 인류가 비만쇼크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비만치료제 개발에 나선다. 한편, 주인공이 대학 시절부터 남몰래 사랑하던 신비스러운 여인 ‘누리’가 접근해 오는데…▲알에스(RS) 스스로 천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고난이도 학술 논문을 대필해 주며 용돈 벌이를 하던 도서관 사서 카이. 미국 국가 안전 보장국의 특급 암호 알고리즘 'L함수'의 비밀과 접하면서 카이의 천재성을 알아본 유진. 두 사람이 창설한 카이 그룹은 세계적 난제를 통쾌하게 해결해 가는데…▲L함수의 연산법(제1회 한국인터넷문학상 수상작)L함수는 인간의 모든 의식을 고유화된 멱함수로 정의하고 독특한 연산법칙으로 표현할 수 있는 듀아멜 공간에서 성립 가능한 함수 중 하나. L함수를 연산할 수 있는 사람은 사물이나 대상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거대그룹 필에 입사한 L함수의 연산자 민이는 필그룹의 가상현실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기초자료를 위해 L함수 연산을 행하던 중 분자의 기억에 감염된 가드너라는 신경정신과 의사로부터 자신의 내부에 악마가 있다며 도움을 요청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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