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포르시안] 빈껍데기나 다름없다. 한국의 의료제도, 의료인프라, 의료서비스 수준은 밖에서 보기에 그럴 듯 하다. 짧은 기간에 이룩한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는 미국조차 눈여겨 볼 정도다. 의료기관은 또 어떤가. 1천병상이 넘는 대형병원이 즐비하고, 하루 외래진료 환자 수가 1만명에 육박하는 병원도 나왔다. 그 규모나 외양에 압도당할 정도다. 병원마다 첨단 의료장비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의료의 질도 선진국 수준이다. 주요 암 생존율과 장기이식 성공률, 뇌졸중 등 중증질환 치료는 선진국 수준이거나 더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뭐가 문제인가. 이 정도면 알맹이도 꽉 찬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 싶은데.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의료시스템 내부의 부조화가 심각하다. 의료이용의 양극화와 지역간 의료자원의 불균형, 의료전달체계의 붕괴, '저수가-저부담-저급여'의 3저 시스템 기반의 건강보험제도가 지닌 모순과 한계. 경제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압축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의료의 난맥상이 하나둘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알맹이는 상하고, 지속가능성은 위협받고 있다. 

의료자원의 불균형 문제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수도권에 의료자원이 집중되면서 지방의 의료공급체계가 붕괴 직전이다. 분만과 응급의료 등의 필수의료시스템 공급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역이 늘고 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 도시의 분만병원으로 원정출산을 떠나는 게 더는 새삼스럽지 않다.

의료자원의 핵심인 의사인력의 수급 불균형은 국가적 위기로 인식될 정도다. 산부인과와 흉부외과 등의 외과계열이 전공의로부터 외면받는 지원기피과로 전락하더니 최근에는 내과마저 기피과에 들었다. 내과가 전공의 기피과로 전락했다는 건 예사롭지 않다. 지방의 일부 병원에서는 내과 전공의가 태부족해 중환자실과 응급실 등의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의료계는 "내과의 붕괴는 그 자체로 한국의료의 붕괴"라며 탄식을 쏟아낸다. 조화와 균형을 위한 의료공급체계는 사라지고, 각자도생으로 내몰리는 의사들을 배출할 뿐이다.  

의료전달체계는 사실 처음부터 없었다. 의료전달체계의 목표는 가용한 의료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해 적절한 의료기관과 전문인력으로부터 적정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게 목표다. 1989년 전국민 건강보험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구조화된 의료전달체계 개념조차 생소했다. 이후에 제도적으로 정립됐지만 낮은 의료수가를 기반으로 한 진료비지불제도(행위별수가제)로 인해 의료기관간 환자유치 및 병상 확충 경쟁이 벌어지면서 의료전달체계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특히 전국민 건강보험제도 이후 의료서비스 이용이 급증하자 의료시설 확충에만 급급했다. 정부가 공공병원 확충을 사실상 포기한 가운데 민간 자본 중심의 병원 설립이 주를 이뤘다. 이 때문에 환자유치 경쟁은 치열해지고 의료기관종별 기능 정립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빈껍데기였던 의료전달체계가 지금은 존재감마저 사라졌다. '수도권 대형병원'이란 의료전달체계의 불랙홀이 감기 같은 경증질환자부터 지방의 암환자까지 다 흡수하는 판국이다. 동네의원은 비급여 의료서비스로 내몰리며 일차의료기관으로써 역할을 잃었다. 병원급 의료기관은 갈수록 경쟁력을 잃고 동네의원과 대형병원 사이에서 중간 전달체계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대신 '아프면 서울 큰 병원으로'라는 새로운 의료전달체계가 자리잡았다. 

의료전달체계를 떠받치는 기초에는 금이 가고, 허리는 끊어졌다. 기초와 가운데 전달체계가 무너지는 데 맨 위의 구조물은 갈수록 덩치가 커진다. 당연히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동네의원과 중소병원이 무너지면 의료취약지부터, 지방에서부터 의료서비스 접근성이 악화된다. 동네의원과 지방 중소병원이 붕괴되고 대도시의 대형병원이나 전문병원으로 의료자원이 쏠리기 때문이다. 의료전달체계 붕괴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입는 건 노인과 장애인, 저소득층, 의료취약지 주민 등의 의료취약계층이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도 이들이다.  

건강보험제도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곪을 대로 곪았다. 건강보험은 한국의료가 고도의 압축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압축성장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보험료는 적게 내고, 보장성은 낮게, 의료수가도 낮게 지급하는 '저부담-저급여-저수가'의 3저 시스템이 있었다. 낮은 보험료 덕분에 강제가입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단기간에 전국민 건강보험 시대를 열었다. 문제는 낮은 보험료로 인해 건강보험 보장성도 낮고, 의료수가도 낮게 책정돼 많은 갈등을 초래하는 건 물론 사회보장제도로써 제역할을 못한다는 점이다.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 때문에 큰 병이라도 걸리면 ‘재난적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빈곤층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병원들은 저수가로 인해 ‘3분진료’의 박리다매와 각종 비급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건강보험제도의 이런 구조적 문제는 의료전달체계 왜곡과 의료자원 불균형을 더 가속하는 요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의 보건의료정책 방향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박근혜 정부는 해외환자 유치를 통한 의료관광산업 육성과 병원 수출, 원격의료 기반의 의료IT산업 육성 등에 고집스럽게 집착한다. 최근의 메르스 사태를 통해 한국 의료체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났음에도 깨달은 게 없는 듯 하다. 부실한 국가방역체계와 의료전달체계 붕괴로 인한 적폐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한 의료체계 개혁 의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되레 의료산업화와 영리화 정책에 더 매달린다.

새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정진엽 후보자는 그런 정책 방향의 결정판이다. 그를 두고 의료계에서도 "정부 권력의 허수아비 역할에만 충실할 게 뻔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원격의료는 공공의료를 수행하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말한 건 자신을 지명한 권력을 향한 화답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의사 출신이지만 의료전문가로서 소신과 원칙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보건복지부 위상에 어울리는 인사가 아닐까 싶다. 보건복지부에서 보건의료가 차지하는 위상은 빈껍데기나 다름없다. 빈껍데기 보건의료에 '무늬만 의료전문가'인 부처 수장이라면 그럭저럭 어울리는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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