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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소리] 조선의 사대부들은 감정에 솔직했다눈물편지 / 신정일 지음 / 판테온하우스 펴냄, 2012년

[라포르시안] 어렸을 적에는 무슨 일로 울기라도 하면 사내가 눈물이 흔하면 안된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로부터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라는 말이 내려온다고까지 했습니다. 태어났을 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야말로 남자가 울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일을 당해도 겉으로 표현하지 말고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연행에 나선 연암선생이 요양의 백탑이 모습을 드러내는 산모롱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는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박지원 지음,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 135쪽, 그린비, 2008년)라고 외쳤다는 것을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전송렬 교수의 <옛사람들의 눈물>을 읽으면서 분명해졌습니다. ‘조선의 만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옛사람의 눈물>에는 모두 35편의 만시(挽詩)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시(挽詩)란 죽은 자를 애도하여 지은 시를 말합니다. 이 책에 실린 만시 가운데 허난설헌과 남씨 부인이라는 두 사람의 만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조선의 사대부라는 남성들의 작품입니다. <옛사람들의 눈물>에는 아내를 위해 지은 도망시(悼亡詩), 친구를 위한 도붕시(悼朋詩), 먼저 간 자식을 위한 곡자시(哭子詩) 외에 스승과 제자, 선배, 심지어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위해서 지은 만시, 나아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린 자만시(自輓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다고 배워온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에 유배 가있는 사이에 세상을 하직한 아내를 위하여 지은 만시입니다. “那將月姥訟冥司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나장월모송명사 내세부처역지위 아사군생천리외 사군지아차심비;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전송열 지음, 옛사람들의 눈물 105쪽, 글항아리, 2008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미안함 그리고 원망 등 복잡했을 심사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전송렬 교수는 시는 때로 긴 호흡으로 설명하는 산문보다도 더 애절하게 우리의 감성을 흔들어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슬픔을 설명하지 않는 만시에서 오히려 깊이 농축된 한없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만시(輓詩)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다른 형식으로는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문화사학자 신정일님의 <눈물편지>에서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선인들은 특히 사람이 죽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의학수준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옛날에는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특히 슬퍼할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지극한 슬픔 뒤에 찾아오는 눈물이 나를 서럽게도 했지만 살게 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습니다. 나아가 ‘슬픔으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눈물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하지만 정작 슬픔이 아름답다고 깨닫게 되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뒷일지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슬픔에 굴복하여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애도하는 과정에서 슬픔을 승화시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의 감정을 가슴에 담아 억누르기보다는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물편지>의 저자는 어린 자식, 배우자, 형제자매, 그리고 벗과 스승을 잃은 슬픔을 담은 시, 제문 혹은 서한문 등 산문을 통하여 그 슬픔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담은 글들은 윤선도가 막내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지은 시의 한 대목 ‘눈물은 수저에 흘러내리고’를 제목으로 하여 모았습니다.

첫 번째 글은 다산 정약용이 네 살 된 막내아들 농(農)이 죽었다는 소식을 유배지에서 듣고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산은 남양 홍씨와 결혼한 뒤 19년 동안 10여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외에는 모두 요절했다고 합니다. 편지에 쓴 농은 여덟 번째 아이였던 모양입니다. 농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 다산은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한 일이 벌어지니 이를 어찌할거나’라면서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 얼마나 참혹한 일이었으면 참척(慘慽)이라고 하겠습니까? 전염병에 속수무책이었을 조선시대에는 지금보다도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다산은 자신의 애달픔도 가누기 어려운 지경이었을 터임에도 아내가 겪고 있을 고통에까지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생사고락의 이치를 조금은 깨달았다는 나의 애달픔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네 어머니야 뱃속에서 직접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었으니 그 애가 살았을 때 어리광부리던 말 한마디, 귀엽던 행동 하나하나가 기특하고 어여쁘게만 생각되어 귓가에 쟁쟁하고 눈앞에 삼삼할 것이다. 더구나 여자들이란 정이 많아 이성에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십상인데 얼마나 애통하겠느냐?(19쪽)”라며 두 아들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당부한 것입니다.

다산은 여자들이 감성에만 의지한다고 보았지만, 심의당 김씨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열여덟 살에 죽은 큰딸을 위해 심의당 김씨가 지은 제문에서 그녀는 슬픈 심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아, 슬프다! 사람이 일찍 죽는 것을 누군들 원망스럽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까마는 어찌 너처럼 장성하여 요절함만 같음이 있겠느냐. 사람의 부모라면 누군들 비통하지 않을까마는 어찌 나처럼 후회하면서 슬퍼함과 같겠느냐.(82쪽)” 슬픔이 지극함에도 불구하고 심의당 김씨는 “어쩔 수 없구나! 세월은 지나가고 이승과 저승의 길은 다르니(…) 아아, 슬프다. 운명이 아닌 것이 없으니, 오직 편안하게 거처하기를….”이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슬픈 감정을 이성적으로 잘 다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과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을 꽃피우게 했던 송강 정철은 남다른 면모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기축옥사에서 많은 동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송강 역시 정쟁에서 밀려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유배 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은 제문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네 배필을 가릴 때 애혹(愛惑)에 빠짐을 면치 못하여 병이 든 사람에게 출가시키어 두어 달 만에 네 남편이 죽으니 나이가 겨우 스물 둘이었다. 유약한 네가 이런 참혹한 변을 당하여 곡벽을 절차 없이 하며 죽기로 작정하고 먹지를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을 하니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차마 가까이 할 수조차 없었다.(55쪽)” 송강이 애달파한 것은 사위가 될 사람의 건강을 미리 챙겨보지 못해 딸이 청상에 과부가 된 것이었고, 남편을 앞세운 딸이 먹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면서 천식을 얻어 병이 깊어져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모두 자신의 잘 못이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혹(愛惑)이라 함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눈이 멀었다는 의미인 바, 딸의 결혼을 앞두고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져 집안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또한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편들은 아내가 죽으면 울다가도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이런 우스갯말을 주고받을 정도의 세태가 되었나 싶으면서도 옛날에는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눈물편지>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보면 대체로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긴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순조시절 지방관을 역임한 심노숭이 “아내를 잃고 너무 슬퍼하는 자는 세상에서 비웃는 까닭에 아내를 잃은 자는 풍속을 두려워하여 그 슬픔을 숨긴다.(심노숭 지음, 눈물이란 무엇인가 17쪽, 태학사, 2002년)”라고 적은 것을 보면 조선 말기 이르러서야 남자의 눈물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모양입니다.

명종 때 사간을 지낸 권문해는 마흔아홉이 되던 해 후사도 없이 아내가 죽었습니다. 30년을 같이 산 부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칭송했습니다. “엄전한 모습과 아름다운 덕을 지녀 집안을 화평하게 하고, 부녀의 도리를 다하여, 짜증을 부리거나 시샘하는 것을 우리가 부부로 맺어진 이래 30년 간 나는 한 번도 보고 듣지 못하였소.(95쪽)” 며느리의 수의를 시어머니가 직접 지었다니 고부간의 사이도 아름다웠던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여든 노모가 생존해계서서 봉양은 물론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하는 권문해의 걱정은 오히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에둘러 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라고 애달픈 심사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 그의 슬픔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권문해는 아내의 죽음 이후에 슬픔에 빠져 울면서 지내느라 일기마저도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앞서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남편이 있었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된 남자의 허리춤에 이가 서 말이라는 옛말처럼 혼자된 남편의 모습은 아무리 잘 보아주려해도 그럴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심노숭의 아내는 죽음을 앞두고 ‘공연히 지아비 잠깨우지 마세요. (…) 가군께 인사를 못 드리니 죽어가면서도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115쪽)’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아프면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는 심노숭이 아내 완산 이씨의 영전에 바친 제문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눈물에 대하여 천착한 심노숭은 무려 26제의 시와 23편의 문을 남겨 아내를 애도한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심노숭은 파주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사도 하기 전에 아내가 죽음을 맞았던 모양입니다. 덩그렇게 큰 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길가는 나그네 같은 느낌이 들었던 심노숭은 “불교에 원업이란 말이 있다. 말하자면 인과라는 말인데, 당신은 낙토(樂土)로 갔는데, 나는 악도(惡道)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네(113쪽)”라고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만시에 함축적으로 담았던 김정희는 아내에 바치는 제문에도 절절한 마음을 담아냈습니다. “아아, 나는 강 앞에 있고 산과 바다가 뒤를 따랐으나 아직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낱 아내의 죽음에 놀라 가슴이 무너지고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 아아, 대체로 사람마다 죽음이 있거늘 홀로 부인만 죽음이 없을 수 없으리오. 죽을 수 없는데 죽은 까닭에 죽어서 지극한 슬픔을 품게 되었을 것이고 기막힌 원한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차 품어내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공부자(孔夫子)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기에 지고보다도 더 심하고 산과 바다보다도 더 심함이 있는가 보다.(120-1221쪽)” 유배에 처해졌음에도 흔들림 없던 마음이 아내의 부음에는 황망해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책읽기를 마치고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습니다. 예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인륜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천붕지통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지극한 슬픔을 담은 글은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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