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통치 수단으로써 이용된 의학…수많은 의료인들 항일활동에 뛰어 들어

[라포르시안]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지식인이었던 의료인들은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써 의학과 보건위생을 어떤 식으로 이용했을까.

광복절을 앞두고 일제강점기 보건의료인들의 행보와 식민 통치에서 의학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자리가 마련된다.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은 오는 27일 저녁 7시30분부터 '일제강점기 보건의료인들의 정치적 행보: 친일과 항일 의사(醫師)들 이야기'라는 주제로 8월 월례포렴을 연다.

이날 포럼에서는 건강과대안 최규진 연구위원(의학사 전공)이 발제를 한다.

최규진 연구위원은 이날 발제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친일과 항일에 뛰어든 의료인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특히 일제가 식민치 통치 수단으로 의학과 보건위생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 의미를 되짚어볼 예정이다.

최 연구위원은 라포르시안과의 통화에서 "일본 식민정책학의 창시자인 니토베 이나조는 '식민지 경영의 방법이 반드시 위생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또 의학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제 식민통치에 있어서 의학의 역할을 강조했다"며 "일제가 식민통치를 통해 조선의 보건위생 수준을 높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최 연구위원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대한의원이나 자혜의원 등은 조선인들에게 시혜적 의료를 제공한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의료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했다.

일제치하에서 많은 의료인이 항일활동을 했다.

당시 의료인들은 식민지 지식으로서 강압통치에 대한 반발과 일제의 차별정책에 깊은 분노를 느껴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제중원의학교 출신으로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 자격을 획득한 7명(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앞서 한국의사100주년위원회와 대한의사협회는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의사 선각자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취지로 지난 2006년 8월 ‘제1차 한국의사 100년사로 본 의사 독립운동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의사100주년위원회는 당시 심포지엄에서 의사 독립운동가로 ▲서재필 ▲김필순 ▲이태준 ▲나창현 선생 등을 소개했다.

100주년위원회에 따르면 이태준 선생은 중국과 몽골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항일운동에 쓰일 무기제조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일제 관동군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백군에 잡혀 일본군에 의해 38세에 요절했다.

나창현 선생은 3·1만세와 청년외교단 및 대동단 비밀단원으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 임시정부로 참여시키려다 발각돼 상해로 탈출한 후 기관지 ‘독립’을 발간하고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부차장, 병인의용대장 등의 요직을 지냈다.

이후 상해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폭파하려다가 발각돼 쫓기면서도 상해에서 병인의용대를 부흥시키는 등의 독립운동을 했다.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로는 단채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선생을 꼽을 수 있다.

국가보훈처의 기록에 따르면 박자혜 선생은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에서 근무하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함께 근무하던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박자혜 선생은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당시에 서울의 길 안내를 지원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들과 반대로 친일 행적을 보인 의사도 분명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776명 가운데 의사나 의료와 관련된 인물들이 눈에 띈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의대 인문의학교실 황상익 교수는 2013년 펴낸 '근대의료의 풍경'이란 책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 중에서 의사나 의료와 관련된 사람은 16명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책에서 황 교수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의사라 하더라도 의술과 직접 관련된 행위로 선정된 경우는 거의 없고, 다른 친일적 사회 활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친일 의료인 16명 중 5명은 일본군이나 만주국 군대의 장교(군의관)를 지낸 경력으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현대의학 도입이 본격화 됐다는점을 감안하면 보건의료인의 친일과 항일 행적, 그리고 식민 통치 수단으로써 보건의료정책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건강과대안의 최규진 연구위원은 "의학사 차원에서 보건의료인의 친일과 항일 행적, 그리고 일제가 식민 통지 수단으로써 의학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제 위생당국의 강압적 조처에 맞선 미증유의 사건"

일제가 서양의학 기반의 보건위생을 앞세워 조선인을 차별하는 동시에 식민 통치를 합리화 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조선인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임상시험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에서 발생한 '에메틴 중독사건'이다. 

일제는 당시 조선인에게 발생률과 치사율이 높았던 폐흡충증(폐디스토마)을 풍토병으로 보고, 식민지 통치 확대를 위한 차원에서 풍토병 연구에 관심을 쏟았다.

그 일환으로 일본인 학자를 중심으로 조선에서 폐흡충증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시작됐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신규환 교수는 '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1927년 영흥 및 해남지역 에메틴 중독사건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 내용을 상세히 다뤘다.

이 논문에 따르면 함경남도 경찰부 위생과는 폐흡충증(폐디스토마) 환자의 치료를 위해 1927년 3월 1일부터 19일 동안 영흥군(현 함경남도 금야군) 지역 청장년 104명에게 에메틴(Emetine)이라는 항생제를 주사했다.

3월 18일까지 에메틴 주사를 맞은 4명의 환자가 사망했으며, 3월 20일에는 추가로 2명이 사망했다. 3월 24일 위생당국은 날씨 때문에 환자들이 감기에 걸렸고, 폐렴이 생겨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조선총독부는 공식담화를 통해 에메틴 주사를 맞은 6명의 환자가 사망한 이 사건은 갑작스런 한파로 감기가 유행하면서 에메틴 주사를 맞은 환자 중에서 급성폐렴이 병발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해명하고, 이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당시 '한성의사회'가 개입해 사망사건은 단순한 폐렴에 의한 게 아니라 중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한성의사회가 파견한 두 명의 의사는 3월 27일 영흥에서 하루 동안 현지조사를 실시한 후 3월 31일 조사결과를 한성의사회에 정식으로 보고했다.

한성의사회의 보고에 따르면 에메틴 주사를 맞은 8명을 조사한 결과, '중독증상이 현저하다'고 결론 내리고, 대책강구회에도 조사결과를 정식으로 통보했다.

이를 계기로 영흥청년회는 책임자를 탄핵하기로 결정했으며, 대책강구회에서도 사건 책임자들의 처벌을 당국에 요구했다.

당시 일제는 이 사건과 관련된 각종 강연회를 금지시켰으며, 기자들의 취재활동까지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조선통치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에메틴 사건에 대한 비판연설도 못하게 했다.

결국, 1927년 4월 2일 조선총독부 위생과는 각도에 통첩을 내려 에메틴 주사를 중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신규환 교수는 "에메틴 중독 사건은 사건을 은폐하려는 위생당국에 맞서 각지 시민단체 및 사회단체가 진실을 규명하는데 앞장서고, 의사사회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위생당국의 강제적이고 부당한 조처에 당당하게 맞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조직화된 미증유의 사건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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