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돌 / 존 러스킨 지음 / 박언곤 옮김 / 예경 펴냄, 2006년

[라포르시안] 오랫동안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의 맨 위에 올라있던 존 러스킨의 <베네치아의 돌>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베네치아하면 운하를 미끄러져 가는 곤돌라와 곤돌라 사공이 부르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3년 전 이탈리아 스트레사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할 때 시간을 내어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년 전 [북소리]에서 소개한 <건축의 일곱 등불>을 통하여 존 러스킨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긴이는 “건축의 미학적 개념과 사례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도덕관, 종교관, 경제관을 바탕으로 종합적 사고로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건축 자체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을 유도한다(건축의 일곱 등불 299쪽)”고 평하였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화가, 예술비평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회개혁 사상가였던 존 러스킨(1819-1900)의 관심사는 예술을 비롯하여 문학, 자연과학(지질학과 조류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어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우리나라에는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의 드로잉>, <황금강의 임금님>, <베네치아의 돌>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러스킨과의 만남이 이어진 것은 프루스트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러스킨에 매료되어 있던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방대한 분량의 역자 서문을 붙였는데, 이 서문은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독서에 관하여>에서 “독서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주장한다.(독서에 관하여 29쪽)”라는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면서, “독서는 대화와는 다르게 혼자인 상태에서, 즉 고독한 상태에서 지적인 자극을 계속해서 즐기고 영혼이 활발히 활동하게 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독서관을 보였습니다.

이밖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사라진 알베르틴>에서도 러스킨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베르틴의 비밀을 알게 된 마르셀이 그녀의 문제에 무관심해지기 위하여 어머니와 함께 베네치아로 향합니다. 굳이 “점심 식사 뒤, 혼자서 베네치아의 시가를 산책하지 않을 때에는, 러스킨에 관한 연구를 적어 둔 공책을 가지러 내 방에 올라갔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라진 알베르틴 293쪽, 국일문화사)”라는 구절을 들지 않아도,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지나면서 만나는 풍경을 마치 중계하듯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곤돌라를 타고 대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양쪽에 늘어선 귀족 저택이 장밋빛 측면에 빛과 시각을 반사시키고 있는 광경을, 그것이 유명한 건물이라든가 사저라기보다도, 저녁 무렵에 쪽배를 타고 일몰을 보기 위해서 그 밑까지 간, 잇닿은 대리석 절벽같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 풍치를 바라보았으니까 말이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라진 알베르틴 273쪽, 국일문화사)”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다보면 러스킨이 <베네치아의 돌>에 무엇을 기록했는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점점 커졌지만, <베네치아의 돌>은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습니다. 최근 다니기 시작한 마을 도서관의 귀퉁이에 숨어 있는 이 책을 발견하였을 때 기쁨보다는 놀라움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러스킨이 스케치한 산 마르코 성당이 아닐까 생각한 표지가 사실은 윌리암 터너라는 화가가 1834년에 그린 <베네치아 세관과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일부라는 설명에 조금 실망했고, 옮긴이가 적은 머리말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베네치아의 돌>은 러스킨이 1851년부터 1853년까지 집필한 모두 3권의 책의 내용을 요약한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러스킨 자신도 원본에서 너무 많은 어휘를 사용했다고 해서 1877년 트레블러 출판사에서 ‘요약본’을 출간하면서 원본이 1/4로 축소되었다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요약본에서는 건축의 원리를 제시한 ‘건축의 길잡이(do it yourself)’와 ‘고딕의 본질(The Nature of Gothic)’에 관한 글이 생략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옮긴이는 저자의 요약본에서 빠졌던 첫 번째 책의 내용들을 대부분 포함시켰으며, 오히려 장식에 관해 지나치게 장황하게 설명한 부분을 생략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옮긴이가 건축을 전공했기 때문에 장식에 대한 배려가 소홀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베네치아의 돌>이 ‘분명 대단히 독보적이고 흥미로운 책이며, 순수한 교과서적 건축론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건축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목차에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은 나타나지만 세 번째 책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책에서는 아예 빠져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벽, 코니스, 아치, 지붕, 버트레스, 중첩을 비롯하여 장식을 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첫 번째 책의 내용은 주로 건축의 원리에 관한 내용을 다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은 베네치아에 세워진 건물들을 중심으로 비잔틴 시대, 고딕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을 설명합니다.

러스킨은 제1장 탐색에서 왜 베네치아의 건축을 논하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건축은 나쁘건 좋건, 옛 것이건 새 것이건 간에 그리스에서 파생되어 로마를 거쳐 왔으며 동방에 의해 채색되어 완성되었는데, 베네치아의 건축이 그 기원에서부터 줄곧 나머지 유럽의 건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같은 동네에 건축을 전공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시카고로 이사를 가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시카고는 미국의 근대 건축의 박물관이라는 것입니다. 시카고에 세워진 건물들이 미국의 근대 건축의 시대적 변모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에 따르면 베네치아의 건축이 유럽 건축의 시대적 변화상을 담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적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해석합니다.

우선 러스킨은 건축물이라고 하면 세 가지 미덕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1. 건물은 기능이 좋아야 하고, 의도한 대로 최상의 효율로 이루어져야 한다, 2. 건물은 잘 설명되어야 하고, 의도한 대로 가장 좋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3. 건물은 보기 좋아야 하고, 기능이나 표현이 어떻든 간에 건물이 있음으로 해서 기쁨을 주어야 한다.(27쪽) 결론적으로 건물은 보는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보호와 위치라는 건축의 임무를 제시하면서 ‘건축의 6가지 분류’를 제목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분류의 어느 한 항목도 보이지 않아서 무슨 내용을 담았던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건축물의 벽체의 전형으로 알프스를 든 것은 러스킨의 사유의 폭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알프스는 벽체의 전형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의 한 단편으로서 아주 뛰어난 예라 할 수 있다. (…) 이 꼭대기의 코니스는 거의 150피트(약 46m)의 높이에서 육중한 측면을 굽어보고 있는데, 이는 빙하면에서 3,000피트(약 900m), 해수면에서 14,000피트(약 4200m) 위에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진실로 장엄한 벽이며, 알프스 산맥 몬테체르비노 전역에서 가장 가파르고 가장 견고한 존재이다.(45쪽)”

옮긴이는 장식에 관한 부분이 지나치게 장황하여 생략했다고 합니다만, 장식에 관한 러스킨의 생각은 매우 독특한 것 같습니다. 러스킨은 장식은 신의 창조물과 인간의 창조물로 구분하고, 모든 고귀한 장식은 신의 창조물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인간 자신이 창조한 것들은 천박하고 저급한 것으로 치는 것입니다. 장식의 기능이란 그것을 보는 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데 “진정한 행복은 신을 응시하는 것으로, 신이 하는 일들과 신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신의 율법을 따르고 신의 의지에 당신을 맡기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91쪽)”라고 본 것입니다. 신이 창조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장식의 소재가 될 수 있는데, 추상적인 선, 대지, 물, 불, 하늘의 네 가지 요소와 동물의 유기체를 모방한 형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장식의 취급’이라는 장에서 러스킨은 베네치아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느릅나무와 잎이 무성한 포도넝쿨 사이에 한 두 갈래로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 나무의 얇은 잎사귀들은 홍조를 띄고 포도송이는 점차 짙은 푸른빛을 띠어간다. (…) 태양은 천천히 솟아오르고, 돌로 광장의 하얀 벽을 강렬히 내리쬔다. 브렌타 강의 갈라진 지류에 자리한 황량한 무대는 불규칙적이고 반쯤은 흐르지 않는 수로를 형성하며, (…) 약 200야드를 걷고 나서야 비로소 수로 말단의 강가로 난 양측 긴 계단을 가진 낮은 선창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은 온통 베네치아의 검은 배들로 덮여 있다. (…) 노를 저어감에 따라, 곤돌라의 측면을 가볍게 쓸어 올리는 노의 궤적은 마치 은빛 부리를 앞으로 내뻗는 것과 같다. (…) 서쪽으로는 메스트레의 탑이 빠르게 멀어져 가고, 그 뒤로 시든 장밋빛 석양이 서서히 물들어 간다. 네다섯 개의 돔과 끝이 Qy족한 말뚝들이 멀리 보이는 희미한 형체들 속에서 확연히 솟아나 보이지만, 처음 눈길을 끈 것은 북쪽 위로 피어오르는 음침한 검은 연기구름이며 그것은 교회의 종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베네치아이다.(107-109쪽)” 한폭의 세밀화를 그리듯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곳인가 봅니다.

두 번째 책은 베네치아 지역에 세워진 건물들을 건립방식에 따라 비잔틴 시대, 고딕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베네치아에서 북쪽으로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토르첼로섬에 있는 토르첼로 성당과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들었습니다. 러스킨은 건물의 모양만을 두고 논의한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이 자연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지까지도 살피고 있습니다. “토르첼로 교회는 심지어 황혼이 깊을 때조차도 조각품과 모자이크들이 지극히 세밀한 부분까지도 자세히 드러난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 햇빛이 자유롭게 들어오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거기에는 더더욱 우리를 감동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125-126쪽)”

저자는 고딕시대의 건축물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고딕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고트족의 문화적 배경이 얕은 점을 꼬집기 위해서 고딕양식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만성을 고딕의 정신의 맨 위에 두곤 합니다만, 러스킨은 변화성과 자연주의, 견고성 그리고 잉여성 등을 고딕의 특징으로 꼽고 있습니다. 즉, 예술적 창안이나 계획은 위대한 로마네스크나 비잔틴의 장인보다 못했지만, 장식적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에 더하여 사실에 대한 사랑을 더한 점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고딕의 장인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겸손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을 진실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고트족의 후예로서의 시각이 개입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두칼레궁전은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러스킨은 ‘두칼레 궁전에 대한 글은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산물 중의 하나이다’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광장을 사이에 두고 산 마르코 대성당과 복합적 형태로 지어졌고, 건축 이후에 몇 차례 화재가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 양식과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섞여 있어, 개별 양식의 원형으로 기준이 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네치아를 구경했더라면 <베네치아의 돌>에 담은 러스킨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런가 하면 베네치아에 갈 때 건축물들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를 정립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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