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생각한다 / 토니 주트와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지난주에 이어 한 역사가의 삶을 되돌아보는 책을 읽었습니다. 예일대학 역사학과의 티머시 스나이더교수가 뉴욕대학에서 유럽근대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토니 주트 교수와 나눈 대담을 정리한 '20세기를 생각한다'입니다. 토니 주트 교수는 지난 4월 '기억의 집'으로 라포르시안 독자들과 이미 만난 적이 있습니다. '기억의 집'은 저자가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는 동안에 발표한 글들을 묶어서 사후에 내놓은 책인 반면, '20세기를 생각한다'는 스나이더 교수가 예일대학에 잠시 머물던 2009년 1월부터 여름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주트 교수의 집을 방문해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스나이더 교수는 서문에서 이 책을 역사이자 전기이며 윤리학 논문이라고 정의하고, “이 책은 유럽과 미국의 근대 정치사상사이다. 주제는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파시스트 지식인들이 이해한 권력과 정의(正義)다. (…) 이 책은 정치사상의 한계(그리고 쇄신능력)와 정치 영역에서 지식인들의 도덕적 실패(그리고 의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9쪽)”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20세기를 생각한다'는 '북소리'에서 이미 소개했던 버나드 루이스 교수의 <100년의 기록>처럼 토니 주트교수의 삶과 학문의 세계를 집대성한 기록입니다. '100년의 기록'의 저자 버나드 루이스교수가 유대계인 것처럼 토니 주트교수 역시 친가와 외가 모두 동유럽에 뿌리를 둔 러시아 유대인으로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사건 이후 여러 나라를 거쳐 영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두(冒頭)에서 자신의 뿌리를 거슬러 밝히고, 출생경위와 성장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배경을 설명하는 모양새가 닮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주트 교수의 전공이 유럽의 역사이기 때문인지 유럽의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까지 이야기가 확대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저자는 유대인 문제가 자신의 지적활동이나 역사 연구에서 결코 중심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만,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는 가운데 유대인 문제를 빠트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의 집'이 개인적인 삶에 관한 기록이었다고 한다면 '20세기를 생각한다'는 학문적 성과는 물론 자신의 철학이 형성된 과정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면, 책읽기도 환자 사례를 경험하는 일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평생 보기 힘든 사례를 누군가는 잇달아 경험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어쩌면 첫 번째 사례를 경험하면서 공부한 깊이 덕분에 다른 의사라면 놓칠 수도 있는 희귀 사례가 진단되는지도 모릅니다.

사전에 질문의 요지를 건네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즉흥적이고 예측 불가능하였고 때로는 장난기도 섞여있었지만, 두 사람의 정신적 도서관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잘 분류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녹취한 자료는 스나이더 교수의 서문과 주트 교수의 에필로그를 비롯하여 모두 9개의 장으로 편집되었습니다. 그 점에 대한 스나이더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장은 전기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토니의 생애와 20세기 정치사상의 가장 중요한 현장들, 말하자면 유대인과 독일인의 문제인 홀로코스트, 시오니즘과 그 유럽적 기원, 영국의 예의주의와 프랑스의 보편주의, 마르크스주의, 유럽과 미국의 사회계획 등을 관통한다.(13쪽)” 책을 읽어가면서 철학은 물론 역사,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에 나온 다양한 저작물의 핵심내용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이 기억용량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히틀러의 파시즘이 느닷없이 등장해서 세력을 얻은 것으로 이해해왔습니다만,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등장했던 것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변화와 혁신을 내세우면서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정치적 방식으로 유럽대륙은 물론 심지어는 영국에서도 부상할 정도였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1930년 전후에 맞은 경제위기에 무능력한 정부에 반발하여 파시스트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지만 1936년 폭력을 유발하고 공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대중적 호응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귀족들까지도 히틀러의 파시즘이 공산주의나 무질서를 막아줄 보루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트 교수는 사회주의 성향인 가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작동방식과 이유를 놀랍도록 훌륭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도 지식인들에게 독특한 매력을 주었다고 합니다. 무정부주의나 개혁주의, 심지어는 자유주의까지도 당대의 사회적 현상을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와 다윈주의와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주트교수처럼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1917년 러시아혁명을 기점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이은 공산주의가 보인 행태에 실망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이스라엘의 키부츠운동에 관하여 알고 있던 것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 따르면 1909년 팔레스타인의 데가니아에  처음 세워진 키부츠는 재산을 공유하는 일종의 집단거주지로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주민들의 의식주와 복지·의료 활동 등에 쓰이고, 남은 재산은 키부츠에 재투자된다고 합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 키부츠는 개인적인 생활과 사적인 소유에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있으며, 현재 이스라엘에는 200개 이상의 키부츠에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다음백과, 키부츠(kibbutz),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22k1158a)

이스라엘 독립 직후에 외국에서 자란 유대 청년들을 키부츠로 끌어들이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유대 젊은이들을 나약하고 현지에 동화된 삶에서 구원하여, 착취당하지도 착취하지도 않는 생명력 넘치는 유대인 농민을 창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주트교수가 키부츠 운동에 빠져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시오니즘이란 유대인성의 허식적 형태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아들의 선택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결국 1967년 6일 전쟁 직전에 소집된 예비군을 대신하여 키부츠에서 일할 자원자 모집에 호응하여 이스라엘에 도착한 주트 교수는 이스라엘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국수주의자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종족차별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아랍에 반대했으며, 가능하다면 어디서든 아랍인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그들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키부츠에 정착하려던 생각을 접게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유럽에 파시즘이 대두된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했습니다만, 스페인 내전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총선에서 승리한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서자 군부가 주도한 군사반란으로 인민전선 연립정부의 정책에 위협을 느낀 반민주세력인 지구와 교회의 호응을 얻어 1939년 반란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공화파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아나키스트 등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하고 있어 정부는 오히려 세력 간의 균형을 깨는 상황을 우려하여 지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내전의 양상은 스페인 사회의 복잡한 역학관계에 따라 카탈루냐 대 마드리드, 남부의 토지 없는 노동자들 대 서부의 중간 계급 지주들, 가톨릭 세력이 강한 지역 대 반교권주의 지역의 대결구도였습니다.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가 병력·탱크·비행기 등을 보내 반란군을 지원하고, 프랑스와 멕시코 정부는 공화파에 장비와 물자를 공급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으로 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4만여 명에 달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좌파진영 인사들은 국제여단의 이름으로 공화파 편에서 싸웠습니다. 1936년 10월 스탈린이 공화파 지지를 선언하면서 복잡해졌습니다. 내전 초기 주변세력에 불과했던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공산주의자들이 지역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좌파의 다른 경쟁자들을 억누르기도 하였습니다. 조지 오웰이 쓴 <카탈로니아 찬가>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바르셀로나의 시가전의 배경이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버나드 루이스 교수는 '100년의 기록'에서 오늘날의 역사연구 역시 과학적으로 상당히 진화했으며, 무분별한 자유보다는 검증 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고 했지만, 주트교수는 역사라는 학문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그리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를 발명하거나 이용할 수는 없다(333쪽)’라는 전제입니다. 이는 보기보다 명확하지 않지만, 지성인에게 혹은 견문이 넓은 독자에게 진실로 들린다면 그것은 좋은 역사책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과거를 무시하는 일보다도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인용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그 사례로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무처장이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미국의 전후 독일 점령을 인용하여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을 들었습니다. 상세한 설명을 더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사담 후세인이 히틀러의 환생이라는 비유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역사와 기억에 관한 비유도 재미있습니다. 저자는 기억이 역사의 배다른 형제라고 비유합니다. 유대인학자들은 오랜 세월을 이어오면서 다음과 같이 기억(zakhor, 자코르)에 관하여 강조해왔다고 합니다. “국가 없는 민족의 과거는 늘 다른 민족의 목적을 위해 기록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유대인에게 주어진 의무는 기억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352쪽)” 그런데 저자는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의무가 과거 자체와 혼동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즉. “유대인의 과거는 집단적 기억에 유용한 과거 일부와 융합된다. 그러면, 당대 최고의 유대인 역사가들의 저술들이 있음에도, 유대인의 과거에 대한 선택적 기억은, 다시 말해 고난과 추방, 희생의 기억은 유대인 공동체의 기억된 내러티브와 합체되어 역사 자체가 되어 버린다.(352쪽)” ‘이와 같은 감성은 실제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라고 저자는 우려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수 역사학계에서 고조선 등의 상고사에 관한 기록을 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학자의 입장 때문인가 봅니다. 자료로 입증되지 않은 역사는 가능성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겠지요.

저자는 마지막 장을 사회민주주의에 할애하였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은 “현존 정치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사회변화를 주장하는 정치이념”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로드베르투스와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제창한 국가사회주의를 모체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카를 마르크스 및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상을 접목하여 만든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혁명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기본원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스웨덴·영국(노동당) 등 서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집권하여 현대 유럽 사회복지제도를 정착시켰습니다. 대공황의 기억, 파시즘의 경험, 공산주의의 공포, 전후 호경기 등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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