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국가 중 상병수당·보험 없는 유일한 나라…소득상실 우려에 방역망 벗어난 자가격리 대상자들

[라포르시안]  현행 국민건강보험법 제50조는 '부가급여'에 관한 근거규정을 담고 있다.

부가급여란 건강보험법에 따른 요양급여비 외에 급여비를 의미한다.

건강보험법 제50조는 '공단은 이 법에서 정한 요양급여 외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임신·출산 진료비, 장제비, 상병수당, 그 밖의 급여를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

부가급여 중에서 임신·출산 진료비, 장제비는 도입이 됐다. 그러나 상병수당은 우리나라에서 낯선 항목이다. 

상병수당이란 건강보험 가입자가 업무상 질병 외에 일반적인 질병 및 부상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상실되는 소득 또는 임금을 현금수당으로 보전해 주는 급여다. 관련 법규정은 있지만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기 때문에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와 달리 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상병수당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OECD 34개 회원국 중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국가는 의료보험이나 다른 공적보장 형태로 상병수당을 제공한다. 미국과 스위스의 경우 상병수당이 없지만 자발적 기업복지와 함께 민영 소득보상보험을 운영 중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에서 상병수당, 혹은 소득보상보험 제도가 없는 유일한 국가이다.

상병수당제도가 없는 탓에 산업재해로 인정된 '직업병'에 대해서는 요양급여와 휴업급여가 보장되지만 그 외의 개인 질환으로 노동력을 상실할 경우 곧바로 소득 상실로 이어진다.

가뜩이나 건강보험 보장성이 낮은 상태에서 질병으로 인한 진료비 부담과 소득 상실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메르스 자가격리하면 유급휴가 가능할까'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

무엇보다 최근 중동호흡기중후군(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상병수당의 도입 필요성이 명확해졌다.

메르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감염 의심환자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자가격리에 들어간 사람 중에서 격리 지침을 따르지 않거나 감염 사실을 숨긴 채 일상생활을 유지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시민의식의 부재'라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배경에는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아 격리치료를 받게 되거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자가격리에 들어갈 경우 곧바로 생계수단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부에서도 이런 상황을 우려해 메르스 자격격리 대상자에게 생계비를 지원키로 했다.

그런데 6월 초부터 메르스 자가격리 대상자가 급증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 '메르스 자가격리 대상자일 경우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는가'하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현행 근로기준법 상 업무상 부상이나 질병이 아닌 개인질환으로 인한 유급휴가는 보장되지 않는다. 업무와 관련성이 없는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노동자의 장기간 휴직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다.

기업별로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을 통해 상병휴가를 실시하고 있지만 대체로 짧은 기간만 인정되고, 장기간 휴직이 필요한 경우에는 퇴직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메르스로 인한 자가격리 대상자가 급증하자 고용노동부는 법적 규정이 없더라도 유급휴가를 주도록 '지도'하겠다고 밝혔지만 직장인에게 고용부의 지도를 믿고 메르스로 자가격리에 들어가면 유급휴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직장인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 때문에 메르스 환자나 감염 의심환자 관리에 구멍이 뚫리고 통제 조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난달 6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30대 중반의 L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5월 26일~28일 사이 입원 중인 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삼성서울병원을 방문했다가 메르스 바이러스에 노출됐다. 5월 28일 저녁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장례식을 치르고 5월 31일 곧바로 회사에 출근했다.

그날 이후부터 6월 3일 메르스 확진을 받기까지 몸에 이상을 느꼈지만 회사를 정상적으로 출근했고, 동네의원을 두 차례 정도 방문했지만 몸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한 대학병원을 방문한 끝에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직계가족의 장례를 치르고도 단 며칠간의 휴가도 얻지 못할만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사실도 모른채 수많은 사람과 접촉하고 돌아다닌 셈이다.

메르스 의심환자로 격리 상태에서 중국 출장을 간 환자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근무하는 회사에 메르스 감염 의심 상황을 알렸지만 어쩔 수 없이 중국 출장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삼성서울병원 이송요원이었던 한 메르스 환자는 발열 등의 증상을 스스로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9일간 이를 숨긴 채 정상 근무를 했다.

가장 취약한 고용 상태인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었던 그가 메르스 의심환자로 자가격리에 들어갈 경우 일자리를 잃을까 우려한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가 한국을 건강보험 미실시 국가로 분류한 이유…"상병수당 없기 때문에"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노동자가 감염병에 걸렸거나 의심환자 상태에서 보건당국의 자가격리 통제에 적극 협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상병수당 도입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비정규직을 비롯해 자영업,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 근로빈곤층과 저소득계층의 경우 질병으로 소득을 상실할 경우 바로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면서 상병수당이 없다는 건 1952년 채택된 국제노동기구(ILO)의 사회보장 최저기준에 관한 조약 위반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양승조 의원은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정감사에서 "우리나라는 일반 질병으로 인한 소득상실에 대한 소득보전을 위한 공적프로그램인 상병수당제도가 없는데, 이는 1952년 채택된 국제노동기구(ILO)의 사회보장 최저기준에 관한 조약 위반"이라며 "1994년에는 상병수당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강보험을 실시하지 않는 국가로 분류된 바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4월 새정치민주연합 김경협 의원은 업무 외 부상이나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휴직을 신청하는 경우 사업주가 1년이내의 상병휴직을 허용하도록 하고, 정부는 휴직 기간 동안 상병휴직급여를 지급하도록 하는 일명 ‘상병휴직법’ (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이 개정안은 지난해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돼 지난 6월 17일 열린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축소심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법안심사소위에서 고용노동부는 재원마련 문제와 근로기준법에서 다룰 것인지, 또는 건강보험법에서 다룰 것인지 등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

당시 법안심사소위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은 "OECD 국가 중 미국하고 스위스를 제외한다면 한국만이 상병제도가 거의 없는 국가"라며 "'국민의 안녕과 생명을 위해서는 참 무심한 나라다' 이런 얘기들이 벌써 한 10년 됐다. 그래서 상병제도를 어떻게든 도입을 하자"고 강조했다.

시민단체에서도 상병수당 도입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연구공동체인 '건강과 대안'의 최규진 연구위원은 “상병수당에 대해 건강보험법 상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감염병 예방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법정감염병에 따른 치료나 격리 조치시 상병수당 보장을 명시하고 이를 어기는 사업주에 대해서는 처벌하는 규정을 두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메르스로 인한 자가격리 조치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개인의 시민의식 탓으로 몰아가는 것이 온당치 않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최 연구위원은 "선진국 등의 사례를 들며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는데 사실 그런 국가에서는 상병수당 보장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돼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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