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기록 / 버나드 루이스 지음 / 서정민 옮김 / 시공사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요즘에는 책읽기도 인연 따라 가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마그레브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슬람과 유대교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그런 인연으로 만난 책입니다. 여기 더하여 이 책을 번역한 서정민 교수를 오래 전에 만났던 인연을 가지고 있어 번역한 책을 통해 다시 그를 반갑게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현존하는 최고의 중동역사학자인 버나드 루이스 교수의 삶과 학문의 세계를 집대성한 기록입니다. 1916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11 개월 정도 지나면 한 세기를 살아낸 셈이 됩니다. 들어가는 말에서도 짚고 있습니다만, 중동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이슬람의 기원과 경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니다. 저자는 학창시절부터 이미 쿠란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전기를 비롯하여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유대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보니 [북소리]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메카로 가는 길'을 쓴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은 가톨릭과 함께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 사이라고 합니다. 중세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제국에서는 유대인들과 공존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나, 사회적 여건이 변하면 서로 개종을 하기도 하는 등 종교적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루이스교수는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자신이 역사학자이며 문명사에 관심이 있다고 밝히면서 현재 우리는 거대한 힘들이 역사를 위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역사란 집단의 기억인데 역사의 부재는 기억상실증이고 왜곡된 역사는 신경증을 일으킨다고 비유합니다. 따라서 역사학자는 ‘도덕적이고 직업적인 책임감을 바탕으로 과거의 진실을 정확히 찾아내고, 파악한 그대로를 제시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스스로 이런 책무를 다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왔다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의 저서를 보면 자신의 뿌리를 거슬러 밝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에서 시작해서 부모님들이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신이 출생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성장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읽는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학문적 배경에는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책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여겨 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책을 소유하면 그것을 읽는 기쁨이 배가 되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도서관이나 법적 소유권자에게 번거롭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특정 구절에 대한 감상과 이해가 더욱 쉬워진다.(27쪽)” 그래서 저자는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즐겨 부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어에도 익숙해 있었으며, 유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열세 살에 치루는 성년식 바르미츠바행사를 위하여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유대의 성년식 전통은 기원전 76년 즉위한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드라여왕이 유대민족의 내부단결을 도모하고자 모든 남자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로서 유대인 가장들 사이에서는 문맹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유대인들은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율법을 암기하였고, 성년식에서는 모세오경 가운데 한 편을 모조리 암송해야 했으며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준비한 강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교육방식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홍익히 지음, 유대인 이야기 161-162쪽, 행성:B잎새, 2013년)결국 저자는 런던대학교에 입학해 역사학, 특히 중동역사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이집트를 거쳐 팔레스타인, 시리아 그리고 터키를 여행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대학원과정을 마칠 무렵 터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저자는 정보부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중동에 파견되어 근무하면서 정보를 분석하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 무렵에는 러시아어, 아랍어, 터키어, 알바니아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를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언어적 능력은 역사학자라면 필수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원전자료를 독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역으로 인한 원전의 왜곡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셈입니다. 결국 1949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제국의 기록보관소를 방문하여 자료를 살펴볼 기회까지 얻어 중동역사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록보관소는 수 세기 동안 유지된 오스만제국의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쌓여 있다고 합니다. 1955년에는 UCLA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 무렵부터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모스크바 등지에서 열리는 이슬람관련 학회의 초청으로 무슬림국가들을 방문하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라는 제목의 장을 꼼꼼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자의 글제목을 보면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자의 학생들은 다양한 이유로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했다는데, 저자는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역사가로서 정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연구 역시 과학적으로 상당히 진화했으며, 무분멸한 자유보다는 검증 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은 정답이 하나인 수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는 과학이 아니며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일치하지 않거나 때로는 모순되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명확하지 않은 인류의 삶과 지식에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저자는 믿고 있습니다.

저자는 정직한 역사 연구에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가설은 분명한 목적과 인식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둘째, 학자는 증거에 따라 자신의 가설을 어떤 단계에서라도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중요한 목적과 용도의 하나는 정당화라고 합니다(202쪽).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 역시 인간인지라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피해야 할 일이지만, 특정 이념이나 권력에 대한 충성심과 편견이 학자의 역사 인식과 표현을 왜곡할 수 있는데, 진솔한 역사가는 이런 위험을 잘 알고 고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1974년 저자는 결혼생활을 청산하면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직장은 물론 조국까지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프리스턴대학교이 근동학과 학과장직과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의 연구원을 겸직할 수 있는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미국 정부의 중동정책에 관하여 자문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사이의 평화협정이 타결되는 과정이 요약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격주의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자는 처녀작인 '이스마일파의 기원'에서 이스마일파의 아사신(assassin)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이스마일파는 주류 수니파에서 떨어져 나온 시아파의 과격한 분파로 이단 중의 이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격목표는 십자군과 같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지배 엘리트와 지배이념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중세의 아시신에게 공격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슬람세계의 통치자들, 군주들, 장관들, 장국들, 그리고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들은 항상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였고, 공격 대상을 쓰러뜨린 후에도 자신은 도주하지 않았으며, 아시신을 보낸 세력 역시 아사신을 구하기 위한 구출작전도 없었다고 합니다. 임무를 끝낸 아사신은 살아남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자살폭탄테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민간인을 원격조종하여 무차별적으로 살상을 하고 인질납치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오늘날의 테러리스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교리, 전통, 법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슬람법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해 혹은 협박을 위한 인질납치와 같은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한다고 합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문명의 충돌의 대표적인 사례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제국이 건설된 것과,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 발칸반도를 점령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독특한 문명양식을 만들어냈고, 그 유적들이 현재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서는 거대한 이슬람사원의 일부를 뜯어내고 가톨릭성당이 자리 잡은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8세기 무렵에 작성된 에스파냐 주재 모로코대사관에서 작성된 문서에는 ‘알라께서 이곳을 이슬람의 품으로 빨리 회복하시길’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도 코르도바 메스키타를 방문하는 이슬람신자는 ‘한때 이슬람 사원이었던 이 신성한 곳에 오니, 오후 기도를 드리고 싶네요(339쪽)“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슬람 강경파들을 ‘이슬람 원리주의'로 칭하는 관행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새롭습니다. ’원리주의‘라는 용어의 근원은 1910년 무렵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주류 교회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든 '원리들: 진실에 대한 증언'이라는 팸플릿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에 대한 비판을 배격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는 문자 그대로 신성함을 가지며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원리주의가 1980년대 들어 특정 이슬람단체를 묘사하는데 동원되었는데, 이들 무슬림단체는 미국의 개신교 원리주의자들과 하등 유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100년의 기록은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구의 일방적인 시각으로 중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고루 보면서 학문적 활동을 해온 루이스 교수의 학문적 배경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대한 분량을 우리말로 옮긴 서정민 교수는 “100년의 기록은 루이스 교수의 학문적 삶을 모두 담아낸 책이다. 또 100년에 가까운 삶을 정리하며 집필한 개인적 회고록의 성격도 갖고 있다. 연구를 하면서 그가 직면한 학문적 고민과 논쟁에 대해서도 솔직히 담아냈다. 이혼이라는 개인사도 여과 없이 기술했고, 노년에 시작한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도 부끄럼 없이 진솔하게 밝혔다.(12쪽)”라고 이 책의 성격을 요약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한 서정민 교수는 이집트 카이로아메리칸대학교의 정치학과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중앙일보 카이로 특파원을 지냈습니다. 서정민 교수가 카이로에서 올리는 따끈따끈한 중동소식을 블로그에서 읽으면서 교감을 하다가 일시 귀국한 서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안내로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중앙성원을 처음 방문한 작은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그의 노고가 밴 번역서 '100년의 기록'을 만나면서 서 교수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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