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아름다운 준비 / 새러 데이비드슨 지음 / 공경희 옮김 / 예문사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지난주에 이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아툴 가완디는 의료인들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환자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라는 것인데, 치료의 성과에 집착하여 환자가 받을 고통을 무시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환자 역시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에 읽은 새러 데이비슨의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는 제가 화두로 붙들고 있는 ‘품위있게 죽기’에 깨달음을 더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툴 가완디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잘 죽는 기술, 즉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새러 데이비슨이 예순 중반이던 2009년 여든다섯 살이 된 랍비 잘만으로 부터 ‘인생 12월을 맞이하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고, 매주 금요일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랍비 잘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두 해 사이에 새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자살 폭탄테러를 피해가기도 하고,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도 미로염을 앓으면서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러와 랍비 잘만이 오랜 시간을 두고 삶의 본질과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를 묶은 것이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입니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금요일 판이 되는 셈입니다. 두 책을 모두 공경희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도 재미있는 인연인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만난 랍비 잘만 섀크터-샬로미는 1924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빈에서 자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로 침공하면서 유대인들을 겁박하던 크리스탈나하트(수정의 밤, 1938년 11월 9일)에 충수돌기염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게슈타포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날 밤 사건의 충격으로 잘만의 가족은 독일을 거쳐 벨기에로 갔다가 비씨정권의 프랑스에서 구금생활을 하던 중에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잘만의 가족처럼 운이 좋았던 유대인들은 나치의 만행을 피할 수 있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의 만행에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새러는 이 점에 대하여 ‘같은 처지의 난민과 사랑에 빠지고, 유대인들이 몰살당하는 판국에 신을 찬미하는 경전을 공부하다니! 신을 향한 분노는 어떻게 됐느냐(93쪽)’라고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분노의 뿌리를 이해해야 해요. 뿌리는 내게 주어진 그 신, 항상 이스라엘을 보호해 줄 그 신, 약속을 어긴 그 신이었지요. 내가 분노한 것으로 더 이상 신을 원치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동안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관념을 지우고 새로운 관념, 즉 더 보편적인 영의 신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랍비 잘만은 답변합니다.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만큼 시련을 받은 민족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련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홍익희님이 <유대인 이야기>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수메르 문명권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우르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이 그곳을 떠나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아브라함이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4백여 년간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보낸 40년, 아시리아의 바빌론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겼던 포로시대, 로마제국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2천여 년을 살아온 유대인들의 역사는 바로 유랑과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웬만하면 벌써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을 민족입니다만,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아 세계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근성 있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성도 중요하지만 일찍 교육체계를 바로 세워 지켜온 것이 핵심요소라고 하겠습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유다왕국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바빌론의 유수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영적 딜레마에 빠진 유대민족에게 선지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은 “성전에 재물을 바치는 것보다 믿음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느님을 더 즐겁게 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하면서, 성전에 고착되어 있었던 종교를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움직이는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즉, 사제가 없는 시나고그(synagogue)에서 학자인 랍비를 중심으로 모여 율법낭독과 기도중심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를 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하스모니안 왕조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무렵인 기원전 76년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유대교를 재건하려면 모든 국민이 <성경>을 읽고 율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에 학교를 짓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남자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율법을 암기하고 배우기 위하여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웠고, 열세 살에 성인식을 치루기 위하여 모세오경 중 한편은 반드시 암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자기가 준비한 강론을 해야만 했는데, 이런 전통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나쁜 상황에 처하더라고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살아남는 방안을 마련해왔습니다. 그만큼 적응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랍비 잘만은 유대인들의 유연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러는 랍비 잘만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십 대 시절에는 예시바(탈무드를 연구하는 유대 학교)에서 금서로 정한 심리학과 철학 서적을 읽었고, 나중에는 타 종교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의식을 확장시키는 약물을 복용했다. 그는 열정적이고 살아 있는 전통의 보존을 돕기 위해 ‘유대부흥운동’을 창시했다.(21쪽)” 랍비 잘만은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하시디즘의 랍비로 임명되었는데, 하시디즘은 기도와 찬양을 통해 신과 하나가 되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는 유대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즉 랍비 잘만은 전통적인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그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는 새러와 랍비 잘만이 나눈 대화를 기본으로 하고,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녹여내면서 끝에 가서는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등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훨씬 약하다고 합니다. 물론 유대교파 가운데 신비주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카발라 종파의 경우에는 환생과 현생 이후를 기록한 문서도 있다고 합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품위있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새러의 질문에 대하여 랍비 잘만은 “그건 그분들의 죽음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들이 선택하도록 해야 할 것(129쪽)”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분이 죽음을 원하신다고 해서 약을 드리거나 머리에 총을 겨누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식사를 거부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선택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기 위하여 약을 먹는 행위를 적극적 자살로,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소극적 자살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랍비 잘만은 적극적 자살은 분명 반대하는 입장인 것 같지만 소극적 자살은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보였습니다. 식사를 중단하는 결심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바뀌면 다시 식사를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적극적 자살이나 소극적 자살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위는 유대의 율법에서 금하고 있지만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 사이에 회색지대가 있을 수 있다고 잘만은 해석합니다. 가톨릭교회나 유대교 회당만이 사람들의 윤리를 결정했던 시절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이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가져가신다. 당신들에게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법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현대에서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주면서도 신의 뜻을 지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점입니다.

새러는 랍비 잘만과의 대담을 통하여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인생 12월을 여행한다고 비유하였습니다. 그 깨달음을 모두 23꼭지의 이야기로 정리하였습니다. 아마 적지 않은 24번째 꼭지는 죽음이 되겠지요? 사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이나 열두 달은 끝없이 순환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12월은 인생의 마지막달이 아니라 새로운 1월을 맞기 위하여 준비하는 달이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든 새러는 랍비 잘만과의 오랜 대담을 통하여 인생의 마지막 구간을 여행하면서 준비해야 할 것을 ‘인생 12월 여행을 준비하다’로 정리해냈습니다.

모두 열두 가지로 정리된 준비과정은 이렇습니다. 1. 용서로 치유하다, 2. 감사한 마음을 갖자, 3. 신에게 푸념하다, 4. 내 존재감을 인식하다, 5. 몸과 마음을 분리하다, 6. 아픔을 받아들이다, 7. 직감에 귀를 기울이다, 8. 고독과 친구하다, 9. 지난 인생을 돌아보다, 10. 하고 싶은 일을 하다, 11. 자동차에 종 매달기, 12. 마지막 순간을 연습하다 등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용서로 치유하기’라고 합니다. 그 대상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내가 해를 입힌 사람,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해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일은 상대가 있는 탓에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저자는 내가 해를 입힌 사람의 명단을 만들고, 그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던지, 편지나 기도로서 용서를 구할지 방법을 결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직접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상개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멀리 있어 직접 만날 수 없는 경우라면 편지를 쓰고, 상대가 앞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합니다. ‘영혼들은 서로 연결되는 장이 있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표현이나 요구가 그 장으로 들어갈 것(312쪽)’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의 끝은 ‘마지막 순간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장례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연습과정은 모두 일곱 가지로 구성됩니다. 1. 놓아 버리기 연습을 한다, 2. 죽는 연습, 궁극적으로 내려놓기 연습을 한다, 3. 재정 상태와 행을 마감할 때의 문제를 정리한다, 4.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이들은 누구인가?, 5. 마지막 순간을 연습한다, 6. 자기 부고 기사를 쓴다, 7. 살아 있는 추모식을 연다. 등입니다. 모두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살아있는 동안에 추모식을 여는 일은 참석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일이라서 더욱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살아온 세월을 정리하고 남은 사람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기는 일은 혼자서 결정하면 되는 일이라서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생전에 남기신 글을 정리하면서 ‘사세(辭世)’라는 제목으로 따로 남겨두신 글을 발견했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으셨던 것이라서 아마도 돌아가실 날을 대비해서 미리 써두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남기셨던 글을 묶어 유고집을 내면서 이 글을 제일 앞에 넣었습니다. 저도 때가 되면 선친처럼 세상에 감사하는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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