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미국 통계국은 미국의 전체 인구가 2010년의 3억1,000만 명에서 2050년에는 4억3,900만 명으로 42%가 늘게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4,000만 명에서 8,800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면서 상자형으로 된 연령별 인구구성이 보다 고연령층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인인구의 주류를 이루는 연령층도 60대 초반에서 점점 높아져 80대 후반으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합니다. 초고령화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맞서고 있는 의료인으로서도 치료를 통하여 환자의 삶을 연장하는 것으로부터, 치료를 통하여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4>, <체크, 체크리스트>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툴 가완디교수가 새로 내놓은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노인들을 진료함에 있어 삶의 질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체크, 체크리스트>는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바 있어 저자가 그리 낯설지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툴 가완디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일반외과를 전공한 분인데, 앞서 쓴 책들을 통하여 의료 현장에 숨겨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진솔하게 밝히고 개선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의료계는 물론 일반인의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현대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요약한 것처럼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서 의학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은 없는지 돌아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의과대학의 교육목표가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지 꺼져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데 있지 않았다.(8쪽)’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자신의 환자가 죽음을 맞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해오면서 의사들의 생각 역시 변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셔윈 눌랜드박사가 쓴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합니다. “우리 전 세대까지는 자연이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상하고 받아들였다. 의사들은 패배의 징후를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려 했고,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덜 오만하게 굴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오늘날의 의사들은 어려운 질환을 기술적으로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만족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 의사로서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지금 시대에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의학이 이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키지 못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유한성에 대처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실망시키고 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의사인 저자가 생의 종말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조망하는 책을 쓴 셈입니다. 저자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친가와 처가의 어른들의 삶을 많이 인용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 최인호 작가 역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나이 들어 변화가 일어나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독립적인 삶, 무너짐, 의존, 도움, 더 나은 삶, 내려놓기, 어려운 대화, 용기 등의 제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목의 의미를 종합적하여 정리해보면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가다가도,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라는 진리대로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의학적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고,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저자는 먼저 현대사회에서 노인의 위치를 고찰합니다. 평균기대여명이 길지 않던 시절에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전통과 지식, 역사의 수호자라는 특별한 기능을 할 수 있어서 조직의 원로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령이 더 이상 희귀한 현상이 아닐 뿐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축적되던 지식과 지혜에 대한 독점적 지위 역시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유통기술의 발전으로 노인들의 입지는 날로 좁아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것처럼, 원만하던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관계가 갈등을 빚는 관계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부모는 어린 자식이 안정된 삶을 확립할 때까지 조언하고 경제적으로도 지원을 하였고, 자식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졌습니다. 하지만 기대여명이 길어진 만큼 부모 역시 스스로를 챙겨야 할 부분이 늘어나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만은 없게 되었고, 자식 역시 스스로를 챙겨야 하기 때문에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일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의 형태 역시 농경사회에서는 적합하던 대가족제도가 산업사회에 적합한 핵가족제도로 변하게 되면서 자식들이 장성함에 따라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처럼 부모 역시 나이가 들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독립적으로 생활하던 부모가 언제까지나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듦에 따라 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필자 역시 최근 들어 느끼는 바입니다만, 나이가 들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경을 써서 몸을 움직이면 문제가 없지만 점차 신경을 써도 넘어지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순간이 언제인가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결국은 누구나 당하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넘어지면 골절을 비롯한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서울 시내에서도 싱크홀이 자주 발생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발밑의 땅이 꺼지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 병을 앓아서 갑자기 생길 수도 있지만, 조금씩 일어나는 노화현상으로 인해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대비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학과 공중보건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전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더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발밑의 땅이 꺼지는 일을 겪는 시기를 늦춰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명제에는 변화가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즉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방식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잃어가는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어가는 것에 대하여 분노만 하다 보면 삶이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혹은 사회적 약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하여 구빈원을 설치하였습니다. 구빈원 가운데는 과연 이런 시설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곳도 있었던 것을 보면 후자에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0세기 중반에는 공적 개념의 부조에 해당하는 구빈원과는 달리 사적 개념의 부조 혹은 사업적 측면을 고려한 요양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구빈원에서 병원으로 집중되는 환자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곁들여지면서 요양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요양시설이 먼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요양병원으로 환자가 이동하는 현상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 보건당국이 주목하고 있기도 합니다.

요양원이 난립하면서 환자를 묶어놓는다거나, 향정신성 약물을 과도하게 처방하는 요양원이 문제가 되고, 환자의 안전에 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화재로 환자들이 생명을 잃는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살고 있는 곳 가까이에 요양원이 많이 들어서고 있음에도 노인들은 여전히 가족들 가까이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충분하게 돌볼 수 없는 처지라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선택해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양원에 이어 등장한 어시스티드 리빙시설은-굳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생활지원시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독립주거시설과 요양원의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시설로서 거주민이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요양원과는 달리 서비스 제공자가 거주민의 삶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거주민의 독립적인 삶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1991년에 뉴욕주 북부의 작은 도시 베를린에서 빌 토머스라는 젊은 의사가 주도하여 요양원 운영에 있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고 합니다. 가정의학 전문의를 갓 딴 토머스는 무료함, 의로움, 무력감 등 ‘요양원에 존재하는 세 가지 역병’을 치유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요양원에 살아있는 생명을 들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요양원의 모든 방에 초록빛 식물을 들이고, 잔디밭 대신에 채소와 꽃을 심은 정원을 만들고, 개, 고양이, 앵무새와 같은 동물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결과는 놀라웠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치매가 심한 노인들마저도 더 의미 있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 이르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말기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역시 내려놓음에 대한 관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나이든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혁신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환자나 가족들 역시 변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90세가 넘어 거동이 불편한 분이 슬관절 치환술을 받고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적극적 치료가 환자의 삶의 질을 확실하게 개선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시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술로 인하여 제한받게 되는 삶의 부분도 충분히 고려가 되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잘 죽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죽는 기술, 즉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를 익힐 필요가 있겠습니다. 말기 암환자에서 호스피스치료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호스피스를 선택한 환자는 삶의 마지막을 가족들과 보낼 수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 치료에 매달린 환자에 비하여 더 오래 살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마지막 순간에서의 치료방향에 관한 결정을 미리 내려두는 것도 의료진이나 가족들 모두의 고민을 덜어줄 수 있는 길입니다. 삶의 마지막 단계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만들고 지켜나가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나름대로 판단하기에 가치 있게 삶을 마무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고하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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