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눈물 / 올리비아 비앙키 지음 / 에두아르 바리보 그림 / 김동훈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북소리를 시작하고 두어 달쯤 지나서 김선희  교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따로 적어둔 한 줄 요약을 보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적 배경인 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뒤쫓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철학이 현대인의 삶에 기여할 방도를 도출하고 있습니다.”라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김신영 교수는 “울고 있다, 우리 시대는. 울고 있다, 나는. 현대인의 눈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다.”라고 프롤로그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눈물이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삶이 너무 고단해서 울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김신영 교수는 철학자야말로 이처럼 울고 있는 세상을 치유할 사람이라고 합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사유를 통하여 물음을 던지는 일이자 던져진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며, 철학적 탐구의 목적은 지식과 진리, 현실, 이성, 의미, 가치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있기 때문이라도 합니다.

 

그래서 “삶이 고달플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달픈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다. 마치 쇼펜하우어가 그랬고 니체가 그랬듯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눈물은 ‘고통의 근원’을 찾는 그리고 니체의 눈물은 ‘고통의 치료제’를 찾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헤겔의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헤겔을 전공한 올리비아 비앙키가 쓴 <헤겔의 눈물>에서 같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키백과사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바로 가기> 포스트모더니즘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헤겔철학은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우선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헤겔철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한 것을 두고 헤겔철학의 본질이 전체주의적 세계관과 맞닿아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후대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헤겔 철학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바 있어 선뜻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던 면도 있었습니다. “헤겔은 어렵다. 헤겔로 철학 공부를 시작하느니 라흐마니노프로 피아노에 입문하거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출판사가 소개하는 농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의 눈물>은 헤겔철학의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입문서들이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헤겔 철학의 난점이나 모순까지도 비판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눈물>에서 보는 또 다른 특징은 에두아르 바리보의 그림입니다. 모두 61개의 글에 곁들여진 71개의 도판은 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철학에 관한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것들입니다. 때로는 난해하지만, 텍스트의 개념이 금방 머릿속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헤겔의 눈물>을 기획한 ‘철학 스케치 시리즈는 저자와 삽화가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공동으로 참여한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핵심 철학을 개성 있게 포착하는 일종의 시각적 실험으로, 난해한 용어와 개념 사용을 피하는 동시에 재치와 깊이가 공존하는 글과 삽화로 즐기는 철학, 보는 철학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헤겔철학’하면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요약되는 변증법이 우선 떠오릅니다. 세상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법은 본질적으로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이 반(反)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합(合)의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의 결과물인 합(合)이 다시 정(正)이 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합이라는 표현은 하인리히 샬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하며, 헤겔은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이라는 표현했다고 합니다.(위키 백과사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서 인용)

올리비아 비앙키는 헤겔의 철학을 ‘자기실현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인에게 자기실현이란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의존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전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실현하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게 보여 주려면, 영원히 기계적으로 윙윙거리며 작동하기만 하는 직접적인 자연적 실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16쪽)”라고 합니다. 헤겔에게 자연은 정신이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기반이지만, 극단적인 기후조건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찌는 듯한 열기는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이를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의미로 트레오레(아프리카 흑인을 지칭하는 개념)의 눈물을 말합니다. 헤겔의 이런 생각은 당시 유행하던 유럽 밖의 세상은 열등하다는 서구중심의 사고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예수 수난의 이야기들을 그리면서 너무 큰 감동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안젤리코의 경험을 인용하면서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를 일치시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안젤리코의 그림에서 보는 화가의 천재적 재능은 화가의 것이 아니라 종교에 자신을 맡긴 결과로서 기독교의 천재성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로서의 삶을 살면서 신앙과 회화예술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임을 알려주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14세기에 그려진 작품임에도 채색이 선명한 것은 나무판에 그려진 템페라방식으로 그려진데다가 금과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갈아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종교는 신적인 정신의 산물이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 인간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125쪽)”라고 헤겔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신과 화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신 자신이 인간들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시간적 존재가 된 신은 인간과의 화해를 최종적으로 확정한 것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흘린 눈물은 하느님의 아들이 겪고 받아들인 고통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신과 자신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기독교를 완결된 종교로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적인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교가 각각 존재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자연종교, 정신적 개별성의 종교 그리고 계시된 종교로 분류했습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역사에 관한 헤겔의 철학 역시 저자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역사는 이성의 지배를 따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파악할 것이며, 직업적 역사가들에 의해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헤겔은 경고합니다. <역사철학강의>에서 역사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하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외부의 앞선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문화를 흡수하여 내부에서 일어나는 힘과 융합되며 민족이 차근히 발전해 나간다. 그 끝 무렵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유입과 내부로부터의 분출이 성공적으로 융화되어 선행하는 문명과 대결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을 북돋운다. 둘째 단계에서는 마침내 선행 문명에 대한 승리를 거두어 행복의 시기를 구가하나, 이렇게 민족이 외부를 향하게 되면 내부의 정치기구가 느슨해지고 긴장이 이완되어 내부 분열이 생겨난다. 그러한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마지막 단계에서는 좀 더 고도의 정신을 소유한 민족과 충돌하여 몰락하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세계사의 모든 민족에게서 동일한 양상으로 발생하는 보편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라고 요약합니다.(위키백과 ‘역사철학강의’에서 인용, 바로 가기)

정신이 보편적 역사 속에서 파악한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발전하면서 민족과 국가라는 구체적 형태를 갖추어 가게 되는데, 그 정신의 활동이 활기를 잃게 되면 정신은 그 민족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향해 떠나간다고 비유합니다. 과거의 지구상에서 꽃을 피웠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이슬람 문명의 부침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진보를 향한 치열한 고민이 사라지고 타성적 흐름에 맡기는 순간 개인이나 민족은 몰락의 길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지만, 이미 멸망 이전부터 멸망에 이르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 때 본토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한 민족들이 있습니다.

헤겔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신이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역사를 이루는 개인들이나 개별적인 사건들은 이성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헤겔의 철학을 결과의 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악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기전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하는데, ‘이성이 자기 대신 열정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 결과 피해와 손실을 겪는 것은 오직 이성이 그것을 통해 현존에 이르게 되는 수단인 열정뿐이다.(50쪽)’라고 설명합니다.

헤겔에 있어 국가는 최고의 이성적 실체로 인간이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의무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세계 안에서 구체화되는 계기가 바로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보다 더 높은 것은 없으며, 개인은 국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합리적 존재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분이 있다가도 외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국내의 평화를 이룩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전쟁이 역사적인 필요악으로 보았던 칸트와는 달리 헤겔은 전쟁이 민족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보아, 절대적 악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전쟁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모순의 하나로 본 것입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면,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사유 안에서 자신의 시대를 파악하는 것이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초월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헤겔은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철학이 근원적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니체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던 것입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이야기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철학이 회색으로만 세상을 그리게 되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낡은 것이 되며, 회색으로만 그리는 것으로는 다시 젊음을 되찾을 수 없고 오로지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날기 시작한다.(104쪽)”는 말은 <법철학>의 서문에 적혀 있습니다. 철학자는 현실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화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존재한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회색조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하며, 실제 세계가 몰락할 때 그것에 대해 서술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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