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집 / 토니 주트 지음 / 배현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15년

[라포르시안]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읽었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기억의 집>의 저자 토니 주트 역시 이미 친숙한 이름이 되었어야 마땅함에도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48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시작으로 옥스퍼드 대학, 버클리 대학, 뉴욕 대학에서 유럽역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데, 저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책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들어는 본 기억이 있어 조만간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니 주트는 불의를 목격할 때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본래적인 의미의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메카로 가는 길>의 저자 무함마드 아사드가 이슬람에 심취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토니 주트가 조국 이스라엘의 잘못을 비판하기를 서슴치 않았다는데서 유대인에 대한 저의 편견을 버리게 될 것 같습니다. <유대인 이야기>에서도 확인하였던 것처럼 저 역시 유대인들은 뛰어나지만 배타적인 경향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10대 시절 몇 차례 여름방학을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보내면서 이미 시온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키부츠는 타국 땅에서 뿌리를 못 내리는 디아스포라들을 본토로 귀국시켜 퇴보상태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도덕적 목적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시작된 노동 시온주의는 아랍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바람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상황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제약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트는 일찍 깨닫게 되었다고 저자는 고백합니다. “집단 자치 정부를 꾸렸다거나 소비재를 평등하게 배급한다고 우리가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타인에게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자부심이 극단에 이를수록 가장 악질적인 인종적 유아론만 강해질 따름이다.(103쪽)” 키부츠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는 이스라엘은 감옥과 같았고 키부츠는 감방같다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특히 6일 전쟁이 끝난 다음 골란고원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혈기왕성한 유대인 젊은이들이 패전한 아랍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온주의와 결별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도, 코뮌주의를 믿는 이스라엘 정착자가 되는 것도, 모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사민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기억의 집>은 토니 주트의 사후에 세상에 나온 유고집입니다. 저자는 2008년 세칭 루게릭병이라고 하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다가 2010년 타계하였습니다.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은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우리에게 알려졌고, 우리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로 우리와 가까워졌습니다. 루게릭병 환자는 대뇌와 척수에 있는 운동신경세포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조금씩 죽어가면서 증상이 나빠집니다. 처음에는 손과 손가락, 다리의 근육이 약해지고 가늘어지는 증상과 함께 말하기나 음식물 삼키기가 어려워집니다. 점차 근력이 떨어지면 움직이기 위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결국은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근육을 움직이는 신경세포가 죽어가는 것이라서 의식이나 감각은 죽을 때까지 정상을 유지 됩니다. 그래서 주트는 ‘자신의 육체가 마치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같다고 비유했을 것입니다.

책을 받으면서 궁금했던 원제 'The Memory Chalet'이나 <기억의 집>이란 제목의 의미는 서문에 이어 나오는 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밤’에서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특히 혼자서 보내야 하는 밤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불면증으로 고통을 받아본 사람은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베개에 머리를 내려놓는 순간 대부분 꿈나라로 가는 저는 충분히 실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생각, 나의 환상과 기억, 잘못된 기억 따위를 샅샅이 훑는 것이다. 정신이 자신을 가둔 육신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사건과 인물 혹은 이야기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이런 정신적 의식은 나의 주의를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흥미로워야 하고, 귓속이나 등허리의 참기 힘든 가려움을 견디게 해줘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잠을 부르는 전주곡으로도 작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루하고 뻔해야 한다.(29쪽)”

이렇게 밤의 시간에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먼 기억까지도 추슬러 만든 이야기들을 다음날 구술하여 글로 정리하였는데, 문제는 저자의 말대로 ‘몇 시간 뒤에 회수 할 어떤 생각을 공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초기 모더니즘 사상가와 여행가들이 세부 묘사를 저장해 두고 회상하기 위해 이용한 기억 방식에 착안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에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억술사라고 불러도 될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이 머물 공간으로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옛날 사람들은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창고에 넣었다 꺼내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트가 밤새 엮은 생각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용한 나름대로의 기억의 집은 1950년대 후반 가족들이 함께 갔던 스위스 빌라르 지방의 고즈넉한 마을 체지에르에 있는 가족호텔 샬레였다고 했습니다. 샬레 자체를 기억의 방아쇠에서 기억의 저장장치로 변모시켰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샬레의 구조 하나하나까지도 사실적으로 눈앞에 샅샅이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방문하고 또 방문하고 싶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샬레는 무한히 재구성되고 재분류된 회상들의 저장고 노릇을 하는 기억의 궁전이 되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주트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매일 밤낮으로 샬레도 되돌아가 친숙한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안락의자 가운데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다음 날 쓸거리에 사용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불러내고 정리하고 배열한 다음에 그 이야기를 샬레의 객실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책에 실린 글들을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라고 전제하고 그래서 ‘부모님이나 나의 유년 시절, 또는 전처와 현재의 동료들을 언급하는 지점에서 나는 글이 말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기에는 에두르지 않는 솔직함이라는 장점이 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이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기억에 담겨있는 20세기 초반의 런던 변두리 마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자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을 첫 번째 글 「금욕」에서부터 엿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물자부족으로 배급을 실시하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금욕이 몸에 밴 저자는 끊임없이 서민들의 금욕을 요구하는 위정자들에게 할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익을 위해 끝없는 상거래에 양보했고 우리의 지도자들이 더 높은 포부를 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더 나은 통치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통치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의 이기심은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약간 금욕적일 필요가 있다.(42-43쪽)”라고 마무리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이야기합니다만, 저자는 그 범위를 더 좁혀서 ‘집을 마음이 깃든 곳’으로 말합니다. 사는 동안 많은 집들을 전전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노숙자라고 한탄하면서도 네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살았던 런던 남서부의 퍼트니를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열 살 때 살던 집에 관한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사라져버린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엘 가려면 돌계단을 헉헉거리면서 올라야 했고, 수도가 없어 한겨울에도 언덕 아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날라야 했습니다. 게다가 집 뒤로는 도시 변두리에 있던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그런 집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듬해 언덕동네를 떠나 도심 가까이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어떻든 주트는 퍼트니의 골목길에서 빅토리아시대적 느낌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퍼트니는 그의 런던이었고, 런던은 그의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억에는 고향동네에서 버스 혹은 전철을 탔던 일부터 기차를 타고 조금 멀리 여행하기, 혹은 배를 타거나 차를 몰아 유럽을 여행하는 일까지 담겨 있습니다. 여행을 통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테두리들을 벗어나는 경험을 맛보면서 생각의 틀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행을 좋아한 저자는 “혼자서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고, 그곳에 다다르는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 좋았다. 걸으면 유쾌했고, 자전거를 타면 즐거웠으며, 버스 여행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기차는 곧 천국이었다.(75쪽)”라고 말합니다.

앞서 저자를 역사학자라고 설명하였습니다만, 책을 읽어가다 보면 다소 변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자는 늘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고, 심지어 열두 살 무렵에는 필요한 학위를 따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도 했다는 것인데, 정작 30대 초반에는 옥스퍼드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중년에 맞는 위기의 포인트에서 아내를 바꾸거나 차를 바꾸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전공을 바꾸었다는 것 같습니다. 동서냉전과 그에 따른 범죄의 책임에 관한 논쟁이 계기가 되어 체코어를 배우게 되었고, 프라하를 방문하였으며 동유럽사를 가르치고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종국에는 <포스트워>를 집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중년의 위기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긍지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덕분에 나는 포스트모던 학파의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었다. 덕분에 좋든 나쁘든, 나는 믿음직한 대중 지식인이 되었다. 우리가 서양 철학을 통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천상과 지상에 존재했고, 나는 그중 일부를 뒤늦게야 보았다.(181쪽)”

앞서 저자가 시온주의와 결별한 유대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래도 저자 나름의 정체성으로 고민한 흔적을 「언저리 사람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자랄 무렵 영국에서 유대인은 명백하게 문화적 편견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부모님들은 조직적인 유대인 공동체를 멀리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대명절을 쇠지 않았고 랍비들의 권고에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럽사를 가르치는 학자로서, 영국인인 동시에 유대인임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유대스러움’이 많이 통용되고 있는 현대 미국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유아론적 사고와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모욕적으로 불리면서도 스스로를 언저리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은 저자가 살고 있는 뉴욕이라는 곳의 특별함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뉴욕이 여전히 세계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인들이 모여 서로 부비로 살고 있으며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도시, 뉴욕. 그런 사람들에게 관대한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언저리 사람들」이 저자의 마지막 글이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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