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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잊히지 않는 숨소리최규진(세월호 가족 의료지원단 활동 의사)
이 글은 건강미디어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건강미디어(http://www.mediahealth.co.kr)에 지난 4월 15일자로 <우리가 건져 올려야 할 것들>이란 제목으로 게재됐습니다. 필자와 건강미디어의 허락을 받고 이 글을 전재합니다.

[라포르시안]  세월호 관련 원고 청탁을 받은 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매번 펜을 놓고 말았다. 뭐 대단한 것을 쓸 자격도,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저 청진기를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유가족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유독 잊히지 않는 숨소리들이 있어 적어볼까 한다. 꼭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 내 스스로 잊지 않기 위해.

가족들과의 첫 만남

2014년 7월 난 학위 논문 마무리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세월호 소식을 듣고는 있었지만 집중해서 볼 여력도, 엄두도 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월호 대책회의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가니 의료지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박사논문 최종심사가 남아 있었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진료가방을 싸고 국회로 향했다.

15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회에서 열 분, 광화문에서 다섯 분이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쭈르륵 앉아계신 열다섯 분 앞에 차례차례 마주앉아 혈압을 재고, 혈당을 재고, 심박수를 재고, 청진을 하고, 병력을 물어 기본 차트를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뭔가 좀 달랐다. 어느 한분도 흔쾌히 팔을 내주거나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질 않았다. 분명 첫 진찰의 서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해본 어느 의료지원보다 저항이 심했다. 급기야 한 분이 화를 내며 진찰을 거부했다. “지금 자식이 죽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단식을 하겠다는데 건강체크는 무슨 건강체크야! 어차피 난 4월 16일 이후로 죽은 몸이라고!”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 단식은 처음부터 정치적 행위로서의 단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내 이성과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몸상태는 내 청진과 문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급히 혈압만 체크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알량한 감성과 이성을 추슬렀다. ‘이들이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라는 뚜렷한 사실 앞에서 감성적, 이성적으로 딱 두 가지는 정리할 수 있었다. 정말 걱정이 된다는 것. 그리고 저항이 아무리 심해도 꾸준히 의료지원을 해야한다는 것.

나의 방문이 차곡차곡 쌓이자 유가족분들도 점차 마음을 열었다. 혈압계를 꺼내기 전에 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고, 혈당채혈에도 움찔하지 않고 무뎌져갔다. 그렇다고 그들의 건강이 좋아질 수는 없었다. 단식은 평소 체력이 좋은 사람도 1주일 고비를 넘기기 어려운 법이다. 게다가 유가족들은 4월 16일 사고가 터진 순간 이후 몸 관리는커녕 식사나 수면도 제대로 못한 상태였다. 하루가 다르게 청진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1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한두 명씩 실려 나갔다.

하지만 한명 한명을 구급차에 태워 보낼 때마다 난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정말 죽을 때까지 단식을 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당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단식농성 중인데도 땡볕에서 몇 시간씩 시위를 했고, 목에 핏줄 세워 발언을 했고, 비 맞으며 행진을 했고, 몸을 던져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을 살리는 길은 구급차에 태우는 일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실려 가면 수액이라도 맞을 테니….

H 엄마와의 대화

단식 농성이 시작된 지 보름정도 지날 무렵에는 대부분 응급실에 실려 가고 남아있는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았다. 잔인한 얘기지만 내 맘은 한결 가벼웠다. 여느 때처럼 국회 앞에 도착하니 H 엄마 한 분만 앉아계셨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분들은 기자회견에 갔단다. 혈압, 혈당을 재고 이것저것 여쭤보며 차트를 채웠다. 차트를 기록하고 있는 내게 H 엄마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리 H도 살았으면 선생님처럼 좋은 일 많이 하는 의사가 됐을 텐데…” 왠지 모르게 잠시 의사로서 벗어나고 싶었다. 펜을 놓고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았다.

“H 꿈이 의사였나 보죠?”, “네, 공부도 잘했고, 의료인이 되면 봉사 많이 할 거라고 동아리까지 만들어서 봉사활동을 다녔어요.”H 엄마는 실성한 사람처럼 국회앞 잔디밭을 멍하니 바라보며 혼잣말 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H 한번 보실래요?” 그녀는 손에 쥐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윗부분에는 열린 문이 있었고 그 문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 아래 부분에는 흐릿한 물체들이 보였다. “이게 무슨 사진이에요?”“우리 H 마지막 모습이에요. 같은 반 친구 A 핸드폰에 담겨 있던 것을 현상한 거에요.” 아무리 봐도 사람은 없었다. “죄송한데 누가 H에요?” “여기 얘에요.” 자세히 보니 사람 다리였다. 순간 멍청한 질문을 뱉었다. “어떻게 다리만 보고 알아요?” “이 바지요. 그날 이 바지를 입혀 보냈어요. 스키니로 입는 게 유행이라는데, 한창 멋 부리고 싶을 나인데…. 주머니 사정이 안좋은 거 알고 자기는 이런 게 좋다며 이렇게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나갔어요.”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통 넓은 바지가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듯 했다.

“참 착한 아이였네요….” 어색한 나의 대답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애아빠 사업이 망하고 제가 벌이를 해야 해서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항상 알아서 잘 했어요.” 그랬다. H는 사진 속에서도 문 바로 밑, 아니 옆자리에서 ‘착하게’ 앉아 있었다. “주말에도 일하느라 한 달에 한번밖에 못 쉬었는데 그날 딸과 데이트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어요.” “주로 뭐하며 데이트를 했는데요?” “영화를 봤어요. 친구들과 노는 게 훨씬 재밌을 텐데 그날이면 항상 나와 함께 영화관에 가주었어요.”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뭐에요?” “어바웃 타임이요.” 계속 마지막으로 함께 본 그 영화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녀는 원래 어촌 출신인데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안산에 왔다고 했다. 남편은 학생운동을 하다 자신이 다니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해서 들어왔다고 했다. 87년 노동자투쟁을 경험하며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고, 자신이 주도해서 노조도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진 세상을 경험하고 남편과 결혼을 하고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H를 키우며 더 이상 바랄 행복이 없었다고 했다.

“참 행복했어요. 아무리 애 아빠 사업이 망하고 해도 나나 애 아빠나 젊음을 바쳐 이 세상이 좋아지는 데 나름 힘을 보탰고, 이제 그런 좋아진 세상에서 우리 딸과 함께 오손도손 산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세월호를 겪고 보니 내 젊었을 적 보던 말도 안 되는 나라가, 그 나라가 하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 있었어요. 분명 우리가 그렇게 싸워서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 행복도 좀 챙기자고 결혼도 하고 딸도 낳고 한 건데... 내가 도대체 왜 살았나 싶어요. 그 모든 게 무(無)로 돌아왔어요...”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던 H 엄마는 며칠 후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의료지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문득 생각나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선생님, 너무 우리만 챙기지 마시고 얼른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세요.” 그 모든 게 무(無)로 돌아왔다던 그녀는 슬프게도 나의 행복을 빌었다. 전화를 끊고 집에 들어서며 그녀가 딸과 마지막으로 함께 보았다던 어바웃 타임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그녀의 말을 따라 소소한 행복이라도 찾을겸 영화를 틀었다. 그녀가 왜 사진을 손에 쥐고 멍하니 앉아 눈을 질끈 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공은 눈을 감으며 과거로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황을 바꾸는 내용이었다. 난 살면서 지금까지 영화를 보며 그날만큼 울어본 적이 없었다.

K 아빠에 대한 기억

결국 국회에 K 아빠만이 남았다. 게다가 물도 소금도 안 드시겠다고 했다. 걱정이 돼 국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부득이 일이 생겨 나갔다 오니 그가 없어졌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의 어머니가 와서 밖으로 도망갔단다. 아들이 물도 끊고 소금도 끊었다는 말에 늙은 노모는 자식이 걱정돼 올라온 것이다. 하늘아래 이보다 잔인한 장면이 또 있을까? 죽은 자식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아빠, 그 아빠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온 아빠의 엄마.

그랬다. 그 역시 누군가의 아빠이자 누군가의 아들이었다. 한참 후 돌아온 그가 아이처럼 울면서 소리쳤다. “도대체 왜 내 맘을 그렇게 몰라주는 거예요! 내가 지금 죽겠다고 이러는 거에요? 살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살겠다고!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요! 제발, 제발...” 아이가 어른처럼 우는 것보다 어른이 아이처럼 우는 게 훨씬 더 가슴 아프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소금도 물도 먹지 않고 그나마 몸 안에 있던 짠물마저 눈으로 쏟아낸 그는 다음날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다시 H 아빠를 다시 만난 건 추석날이었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추석상이 차려진다기에 광화문에 들렀다가 그를 만났다. 그는 그동안 단원고 희생자 부모님들을 만나 상담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내가 제일 부러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생존자 학생들 부모라구요? 아니에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제가 지금 현재 가장 부러운 사람은 유가족 중 부인도 없고, 다른 자식도 없고, 부모님도 나이 들어 다 돌아가신 사람이에요. 여기 아빠들 중에 실제로 그런 분이 있어요. 저는 그런 아빠들을 상담하는 게 솔직히 가장 힘들어요. 부러워서 미칠 것 같거든요. 그 아빠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난 순간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나요. 그 사람은 죽고 싶다고 입밖으로 말할 수도 있고, 그리고 진짜 죽을 수도 있거든요.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난 부인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또 다른 자식도 있어요. 맘은 정말 내 딸 K를 만나러 가고 싶은데... 그 사람들을 냅두고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정말 하루에도 수백 번 죽고 싶은데… 그 말을 뱉을 수도 없어. 내가 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는 어른처럼 울음을 참고 있었다.

위에 적은 내가 본 장면들은 수많은 아픔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신문에 실린 가족들의 눈물사진만으로 대변될 수 없는 수많은 아픔이 존재한다. 너무 아파서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인양되지 못한 고통이 존재한다. 이것들을 함께 건져 올려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망을 또 다른 절망으로 거짓을 또 다른 거짓으로 돌려막기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어떤 행복을 꿈꿀 수 있을까.

최규진  mediahealth20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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