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문화사 / 전완경 지음 / 한국학술정보 펴냄, 2013년

[라포르시안]스페인과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이슬람문명의 자취를 보면서 경탄과 호기심 그리고 의문 등 다양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슬람’하면 전투적이라는 이미지만 그려지곤 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전쟁이나 테러에 관한 단편적인 뉴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오래 전 일하던 실험실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친구는 장난기가 넘치면서도 다정다감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이슬람문명하면 아랍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것인데 어떤 경로로 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렀으며,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유대인, 가톨릭과 공존과 충돌을 거듭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밀려났는지 등등 궁금증은 점차 증폭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한 책읽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함마드 아사드의 <메카로 가는 길>이나, 정인경의 <보스포루스 과학사>, 그리고 김재원 등의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 등을 북소리에서 소개드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랍문화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고 소개드리는 책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오해와 편견을 뒤집을, 아랍인과 이슬람 문화의 참모습을 발견하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이 책은 한국 중동학회 회장을 역임한 전완경 교수가 썼습니다. ‘아랍의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 중요성이 더해 감에 따라 아랍과 이슬람 사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줄이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에서 기획했다고 합니다.

유럽문명이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해진 다음, 르네상스시대에 다시 꽃피울 때까지 중세의 암흑에 묻혀있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너져 내린 건물을 다시 복원하는데도 참고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고대문명을 근대로 연결한 무엇의 존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던 그 존재가 바로 이슬람문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슬람문명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은 콧대 높은 유럽 사람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척박한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랍사람들이 동쪽으로는 인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반도까지 방대한 영역을 차지한데 더하여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고, 이를 근대 유럽에 이를 전수하기까지의 과정은 지중해지역원에서 정리한 <지중해 문명의 다중성>을 읽어 개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인접한 문명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아람문화사>에서는 이런 아쉬움을 상당부분 채워주는 것 같습니다.

388쪽의 다소 많은 분량의 <아랍문화사>는 부록을 포함하여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랍인의 기원과 정체성(1장) ▲이슬람 이전 시대 유목생활 중심의 아랍인들의 삶과 그들이 일구어낸 문화적 성취(2장)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 출현 배경과 과정 및 그 문화사적 의미와 이슬람 공동체의 성립과정(3장) ▲국가의 면모를 갖춘 최초의 아랍 왕국인 우마이야 왕조의 문화사적 의미를 아랍주의의 시각에서 집중 조명(4장) ▲이슬람 제국의 확장으로 중세 선진문화를 일구어내며 인류문명의 주체였던 아랍인들의 문화적 성취와 그 영향을 재평가(5장) ▲꾸란을 기록한 언어이고, 천상의 언어로 신성시되는 아랍어가 이슬람과 이슬람 공동체에서 갖는 의미(6장) ▲아랍 시로 대변되는 아랍 문학이 이슬람 제국의 확장에 따른 영향력 증대과정과 아랍 산문문학이 유럽의 산문문학에 끼친 영향(7장) ▲유럽인들의 지적 부흥운동이자 서구 근대화의 계기인 르네상스에 끼친 아랍인들의 역할(8장) ▲중세 이후 암흑기를 경험했던 아랍인들이 ‘나흐다(부흥)’로 불리는 지적 자각의 과정과 그들의 부흥운동(9장) ▲고대의 무지기, 중세의 전성기와 근대의 암흑기를 거치며 형성된 아랍인들의 인식과 그들의 사고관(10장) ▲아랍 특유의 관습 및 전통과 서구 사회제도가 혼합되어 있는 아랍의 사회제도가 갖는 의미와 특징(11장) ▲신라시대 이후부터 한반도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지속해 온 아랍․이슬람 세계와 한반도와의 역사적 교류 과정 등의 순서입니다.

아랍(al-Arab)이란 단어의 근원은 분명치 않으나 고대 셈족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데,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민들이 유프라테스 강 지역 서쪽에 거주하는 민족들을 일컫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 이전 시대의 아랍인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막에 거주한 유목민’을 가리키며,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는 제한적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랍인은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 히브리인, 페니키아인, 아람인, 아비시니아인, 사바인 등과 함께 셈족에 속하고, 이들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셈의 후예들인 셈입니다.

반면에 이슬람 이후로부터 현대적 의미의 아랍인은 아랍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아랍 세계에서 살거나 아랍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으로, 일반적으로 이라크에서부터 모로코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는 19세기에 등장한 아랍 민족주의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이라크의 소설가이며 시인인 자브라 I. 자브라는 “아랍인이란 아랍어를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따라서 아랍으로 느끼는 사람(35쪽)”이라고 정의하였다고 합니다. 역시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아랍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26살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평생을 이슬람의 진정한 정신과 문화를 알리는 연구를 해온 무함마드 아사드도 아랍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궁금합니다.(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메카로 가는 길, 루비박스 펴냄, 2014년)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랍인들은 생존의 문제가 최우선의 과제였기 때문에 투쟁적일 수밖에 없었고, 글을 쓸 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랍 시의 언어와 리듬이라는 문학 유산을 남겼는데, 그들에게 있어 완벽한 인간은 싸우는 기술 이외에도 웅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원년인 622년 이전을 ‘자힐리야 시대’, 즉 무지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페르시아가 대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작은 왕국들이 성쇠를 거듭했고, 아랍사회는 부족들이 이합집산이 거듭되었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날 무렵 아라비아반도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열되어 혼란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이얌 아랍(Ayyam al-Arab), 즉 ‘아랍인의 싸움의 시절’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랍 부족 사이에 끊임없었던 분규와 증오와 반목, 불안한 상태가 유지된 원인은 치열한 생존경쟁과 혈연으로 뭉쳐진 단위 부족의 우상숭배 사상 때문(86쪽)”이라고 보았던 무함마드는 혈연을 초월한 종교사상, 즉 유일신을 믿음으로써 아랍족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공백상태의 도덕적 윤리를 세우기 위하여 선행이라는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라고 합니다.

▲ '아랍문화사'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 캡쳐.

예언자 무함마드는 대상활동을 통하여 기독교나 유대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성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초기에는 자신을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로 알리기보다는 아랍민족들에게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계시된 최후의 심판을 알림으로써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혼탁해진 아랍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전교활동은 당시 메카의 지배계급이었던 꾸라이쉬 부족의 반발을 불러와 충돌이 불가피해지면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메디나 주민대표들과의 협상에 성공하면서 300여명의 신자들을 이끌고 622년 7월 메디나로 이주하였고, 이 시점을 이슬람의 원년으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메디나로 거점을 옮긴 무함마드는 종교지도자에서 정치지도자로 변신하면서 이슬람 역사상 대전환기를 맞았습니다. 메디나의 8개 씨족으로 구성된 새로운 무슬림공동체를 성립시켰고, 이후 메카의 꾸라이쉬씨족에 속하는 추종자들로 구성된 9번째 씨족을 추가하였습니다. 메디나에서 종교적 이념공동체 움마를 토대로 사회적 통일을 이룬 무함마드는 메카와의 지하드를 선언하고 8년여에 걸친 전투를 통하여 승리를 쟁취하면서 반도의 대부분 아랍부족을 통일시켜 자신의 권위 아래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는 세계적 공동체의 바탕이 되는 보편적인 종교를 출범시켰고, 군대를 보유하며 체계적으로 조직된 공동체 내지 아랍국가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공동체는 합의에 의하여 칼리파가 결정되는 체제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에 이르렀으나, 공평무사하지 못한 국정운영으로 내분이 일어 오스만이 피살되면서 무함마드의 4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가 칼리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의 친척이자 시리아의 총독인 무아위야를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났고, 무아위야가 칼리파가 되면서부터는 칼리파를 선출하지 않고 세습하는 우마이야왕조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마이야왕조는 지금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기고 영토 확장에 나섰는데, 661년부터 90년 동안에 걸쳐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전성기의 로마제국보다 훨씬 큰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마이야왕조는 아랍인 우월정책을 펼치면서 아랍 부족 간의 긴장을 유발시켰고, 이슬람 초기에 이루었던 평등과 자유주의가 오히려 퇴조하는 상황을 만들어 결국은 압바스왕조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영토를 확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와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유입되었고,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파들은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흡수하여 통합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지식을 습득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라고 주문하고 있는 꾸란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압바스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사회경제적 불만세력이 주도하여 성립된 것으로 아랍부족에 의한 귀족정치가 소멸하고, 이슬람의 원칙에 바탕을 둔 평등사회정부가 탄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왕국으로, 압바스 왕조는 이슬람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압바스왕조는 지금의 이라크의 바드다드를 건설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이슬람제국은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압바스왕조의 이슬람문화는 그리스-로마의 지중해문화, 페르시아 문화, 인도와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의 표현수단인 아랍어와 이슬람 신앙을 통하여 융합하여 완성한 것으로 특유의 유화력과 상대적인 관용성을 특색으로 한 다양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압바스왕조에 밀려난 우마이야왕조의 후예들은 이베리아반도까지 달아나 코르도바에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열었고, 역시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겪고 있을 때, 아랍어와 이슬람 신앙을 바탕으로 인류문명의 중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실제 르네상스는 15세기에 아랍무슬림의 문화부흥의 영향으로 일어났으며, 이탈리아보다 스페인이 유럽 재탄생의 요람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랍인이 없었더라면 근대 유럽문명은 결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랍인들은 고대 학문의 전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재해석하고 사실을 규명하였으며 추가하였던 것입니다. 스페인의 안달루스나 모로코의 페스 등에 설치된 아랍의 대학에는 유럽의 학자들이 몰려들어 공부하였고, 이슬람은 이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던 체제에 더하여 유럽사회로부터의 십자군, 중앙아시아의 신흥세력, 몽골의 침공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하여 이슬람세계는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웃한 오스만 투르크의 강성으로 우선 타격을 입었고, 뒤이어 유럽제국이 밀려들면서 오랜 세월 침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랍은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아랍민족주의에 입각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다양한 이유로 두드러진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점을 볼 때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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