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 등서 수컷 위주 동물실험…“남녀간 건강 격차 더욱 심화시켜”

[라포르시안]  2010년 3월 26일자 사이언스지(Science)의 인터넷판 ‘뉴스 포커스’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글이 게재됐다.

글의 제목은 'Of Mice and Women: The Bias in Animal Models'이었다. 아마도 존스타인 벡의 유명한 단편소설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사이언스지는 'Of Mice and Women'이란 글을 통해 동물실험에서 관리가 쉽고 암컷에 비해 값이 싼 수컷이 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도출된 실험결과 데이터가 성별로 분류하거나 분석하지 않은 채 신약 개발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수컷 위주 동물실험의 결과는 의약품 사용에 있어서 여성에게 차별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 FDA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시판되다가 안전성 문제로 판매가 중단된 신약 10개 중 8개는 여성에게 훨씬 더 치명적인 부작용을 보였다.

이 중 4개 약물의 위험성은 남녀 신체의 생리적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나타났다. 암컷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새로운 약물의 효과와 안전성을 적절하게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선진국에서는 보건의료 연구 분야에서 젠더(Gender, 사회학적 의미의 성)적 관점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993년 FDA 승인 대상의 임상시험에 성별을 고려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전임상연구에서도 성별 차이를 고려한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지난해 10월부터 동물과 세포를 사용하는 모든 전임상시험의 연구 계획에서 성별 균형을 맞추도록 했다.

국내에선 보건의료분야 젠더 관점 거의 배제돼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은 보건의료분야 연구에서 젠더적 관점이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13년 기준으로 한국 여성의 기대여명은 85.06세로 남성(78.51세)에 비해 훨씬 더 길지만 만성질환 등에 시달려 삶의 질은 더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건강상태를 결정하는 기준을 판단하다는데 있어서 의학적 요인을 중시하는 반면 일터, 가정, 지역사회에서의 생활이 개인 및 집단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거의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건강보험 보장성에 있어서 남녀 간 격차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건강보험 보장률을 보면 여성의 보장률이 54.2%로 남성(59.5%)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고, 특히 여성의 외래진료에서 보장률은 43.7%에 불과했다.

여성 중에서도 19~44세 연령의 보장률은 45.2%에 그쳤고, 6~18세 연령의 보장률도 47.6%에 불과했다.

이 연령층의 여성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률이 낮은 이유는 임신과 출산 관련 의료서비스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성이 낮고, 여성질환에 대한 보장성도 낮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우리도 보건의료분야 연구에서 성별 분리 및 균형을 의무화하고, 남성과 여성의 건강이나 질병에서의 차이를 고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질병관리본부 생명의과학센터 심혈관희귀질환과는 서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백희영 교수와 공동으로 '보건의료연구에서의 젠더 혁신'이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는 보건의료 분야 연구에서 선진국의 젠더 혁신 사례와 정책 방향를 짚어보고 국내에서 이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제안하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보건의료 분야 연구의 모든 단계에서 성과 젠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개발되는 제품이나 적용에서 치명적 결함과 사회적 비용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별이 거의 고려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이러한 배경에는 주로 남성 연구자에 의해 연구가 수행됨에 따라 연구대상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여성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남녀 간 건강 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고령화시대를 맞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수명은 길지만 질병을 앓는 기간 또한 길어 여성들의 건강 문제는 경제사회적으로 많은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보건의료분야 연구에서 성 및 젠더 차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와 이를 고려한 적용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언급하며 보건의료 분야 연구에서의 젠더 혁신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건의료 분야 연구에서 젠더적 개념을 적극 적용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미국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연구에 젠더 관점의 적용이 필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론다 쉬빙어(Londa Schiebinger) 교수는 기초 및 응용 연구 분야에 성과 젠더를 고려한 분석 방법을 도입해 '젠더 편견'(bias, 비뚤림)을 제거함으로써 연구의 우수성과 질을 높이는 과정을 개발했다. 쉬빙어 교수는 이를 '젠더 혁신'이라고 정의했다.

미국과 27개 유럽연합 회원국의 젠더 전문가들과 각 분야의 연구자 약 60여명은 젠더 혁신 연구방법을 연구에 적용하기 위해 수년간의 협력 연구인 '젠더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기초 과학, 공학 및 기술, 환경, 식품과 영양, 건강 및 의학, 운송 및 수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23개의 사례를 발굴하고 발표했다.

여성 심장질환-남성 골다공증 연구에서 젠더 혁식 

보고된 사례 중 보건의료 연구에서의 젠더 혁신 방법을 활용한 사례로는 여성 심장질환 연구와 남성 골다공증 연구가 대표적이다.

여성 심장질환 연구의 경우 미국과 유럽 여성에서 허혈성 심장 질환이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허혈성 심장질환은 남성의 질환으로 인식돼 남성의 병태생리학적 특징과 예후를 기초로 임상에 적용되는 기준이 마련됐다.

실제 여성의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이나 심장병 유병률은 남성 못지않게 높지만 임상연구도 대부분 남성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과 유럽연합 회원국의 젠더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허혈성 심장질환의 진단과 치료에서 간과되었던 성과 젠더 관점을 고려한 젠더 혁신 방안을 제안했다.

즉, 허혈성 심장질환의 병태생리학적인 측면을 재정의해 여성의 특징적 증상을 이해하는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진단기술을 개발하며, 허혈성 심장질환의 증상에서 남녀 차이를 이해하고 심장 질환에서 에스트로겐의 역할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자는 것이다.

젠더 혁신이 오로지 여성만을 고려한 관점은 아니다. 남성 골다공증에 관한 연구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골다공증은 폐경 후 여성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남성에서의 골다공증 위험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고, 치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국과 유럽에서 골다공증으로 인한 골반골절의 약 1/3은 남성에서 발생하나 골다공증의 진단 기준은 건강하고 젊은 백인여성의 정상 골밀도 수치를 기준으로 들어졌으며, 여성보다 골밀도가 높은 남성에서는 그 위험성이 간과돼 왔다.

연구팀은 진단 기준에 남성의 골밀도 수치를 고려하고, 남성에서의 골절과 관련성이 크다고 보고된 요인들을 고려한 진단 기준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보건의료분야 모든 연구에서 성별 분리·균형 의무화해야"

이처럼 유럽과 미국에서는 보건의료 분야를 시작으로 10년 넘게 젠더 혁신에 관한 연구가 진행돼 왔지만 우리나라에서 사례 연구를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가장 최근의 연구는 2013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가 수행한 '과학과 엔지니어링에서의 젠더를 반영한 연구개발 혁신 방안 연구'로, 이를 통해 성과 젠더의 차이를 반영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기초과학·의료·환경·영양학·공학 등의 분야에서 7가지 젠더 혁신 사례를 발굴했다.

작년에는 미래창조과학부와 질병관리본부의 지원으로 보건, 의료, 환경,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10여 가지 사례가 발굴됐다.

보고서는 "국제적 추세에 맞추어 우리나라에서도 각 분야의 연구에 젠더 혁신을 도입할 수 있도록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특히 보건의료분야는 성별의 영향이 어느 분야보다 확실하므로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젠더 혁신을 위해 보건의료 분야의 기초연구부터 임상연구 및 적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대상의 성별과 젠더 고려사항을 계획서에 명시토록 할 것을 제안했다.

연구결과 발표시 모든 자료를 성별로 구분해 제시하고 젠더 분석이 필요한 것은 추가할 것을 명시토록 하고, 보건의료분야 학술지 편집장과 편집위원들에게 게재 신청 논문의 연구 계획 및 결과의 젠더 분석과 결과 해석이 적절한지 평가하도록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

임상연구와 적용 연구에서 사전 연구결과가 성별 균형과 젠더 분석이 적절한지 확인해 함께 제시하도록 의무화하고, 학술지에서 논문 평가 시 젠더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젠더 혁신의 개념을 보건의료분야 모든 연구자와 종사자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관련 교육을 강화하고, 국가 통계를 비롯한 모든 통계 자료에 성별 분리 자료를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도 했다. 

보고서는 "젠더 혁신은 연구의 수월성을 제고하면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고 또 국민의 삶에 질 향상을 이끌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라며 "앞으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분야에서 연구자들이 젠더 혁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시급하며, 연구에서 젠더 혁신을 적극 활용하고 결과 활용의 적실성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 보건의료분야의 모든 연구에서 성별 분리 및 균형을 의무화하고, 남성과 여성의 건강이나 질병에서의 차이는 성별에 따른 영향 뿐 아니라 젠더의 영향이 함께 더해져 나타나는 결과이므로 모든 보건의료분야 연구에서 젠더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이를 연구비 지원 및 결과 발표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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