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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짜 의료세계화’ 덫에 걸린 한국의료
  • 김상기 편집국 부국장
  • 승인 2015.04.0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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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르시안] 1990년대 중반, 당시 김영삼 정권이 만들어 낸 최대 유행어는 '세계화'였다. YS정부는 철저한 준비와 국내 경제의 체질개선 없이 금융과 자본시장을 개방했다. 세계화 구호에 떠밀려 영어교육 광풍이 불고, 외국여행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렇게 세계화에 몰두할 때 한국의 알짜배기 기업이 외국 투기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외환보유고는 조금씩 바닥을 드러냈다. 세계화를 외친지 3년 만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졌다. 1996년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요란 법석을 피우고 1년 만에 빚더미 삼류 국가로 전락했다. '갱제를 학실히 살리겠다'던 김영삼 정권은 한국경제를 '학실히' 망가뜨렸다.  

요즘 보건복지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보건의료정책 아젠다가 바로 '의료세계화'다. 보건의료 분야의 각종 투자활성화 대책을 놓고 '의료영리화, 의료민영화' 논란이 계속 제기되자 복지부가 대안으로 제시한 용어다. '해외환자에게 편리한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 국내 병원의 해외진출을 지원해 의료세계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게 복지부의 논리다. 이를 위해서 국내 의료서비스 분야의 규제를 완화해 해외진출을 지원하고,  해외환자와 외국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하는 정책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다.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정책과 확실히 닮은 꼴이다.

여러 가지 상황이 그때와 겹친다. 국내 병원의 외국 진출이 잇따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중동 4개 순방을 계기로 국내 병원과 의료진의 중동시장 진출을 거의 떠밀다시피 강권하고 있다. 동시에 외국환자 유치를 위한 각종 규제완화 정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의료법인 병원이 외국환자를 유치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각종 부대사업을 허용하는 정책이 추진된다. 경제자유구역에는 외국영리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무리수를 두다 보니 중국의 부실 투기자본에게 영리병원 설립을 허용하려다 국제적 망신을 당한 '싼얼병원 사태'도 겪었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경제를 살리고 국민 건강에 기여한다'는 의료세계화 정책 논리는 가소롭고 어이없다. 언제부터 보건의료가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살리는 수단이었나 싶다. 무엇보다 세계화를 외치기 전에 한국의료는 내부적으로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공공의료는 열악하고, 의료전달체계는 붕괴하고, 의료자원의 공급 불균형은 심각하다. 분만과 응급의료 등 필수적인 의료서비스의 접근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의료취약지역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의료기관종별 기능 정립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대형병원들이 끊임없이 병상 확충과 첨단 의료장비 도입 경쟁을 벌였고, 의료서비스 공급구조가 동네의원과 대형병원으로 양극화 되면서 중소병원이란 의료전달체계의 허리가 끊어졌다.

저렴한 인건비로 노동력을 제공하며 오랜 세월 대형병원의 외형성장 도구로 활용되던 전공의들이 더는 열악한 수련환경과 암울한 미래를 견딜 수 없다면 아우성이다. 힘들고 미래가 불안한 진료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지면서 의사인력의 수급 불균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산부인과와 흉부외과 등의 외과계열이 젊은 의사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분만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원정출산을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일부 분만취약지에서는 모성사망비 증가라는 위험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지방의 환자들이 진료와 수술을 받기 위해 수도권 대형병원을 찾아 쓴 원정진료비만 연간 수조원에 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과마저 전공의 기피과로 전락했다. 2015년 전공의 모집에서 내과가 처음으로 미달사태를 빚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그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내과 전공의를 확보하지 못한 지방 대학병원에서 응급실 진료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버틴다 쳐도 이런 상황이 오래 갈 수 없다. 의료취약지를 중심으로 분만과 응급실 인프라가 붕괴된 것을 시작으로 지역의 의료 공동화(空洞化)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민간병원이 기피하는 지역에 공공병원이라도 세우려나.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는 있는 공공병원마저 없애는 판이다. 

세계화라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가 외환위기를 초래한 악몽이 겹친다.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고, 수백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했다. 직장과 가정을 잃고 노숙자로 거리에 나앉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 상황이 IMF 직전과 비슷하다. 무리하게 병상을 확충한 대형병원들은 그 후폭풍에 직면했고, 문을 닫는 중소 병의원은 갈수록 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는 붕괴했고, 의료자원의 수도권 집중화는 점점 심해진다. 여기에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가계소득이 줄자 아파도 병원을 찾지 않는 국민이 많아지고 있다. 의료이용률이 둔화하면서 건강보험 재정의 급여비 지출 증가세로 떨어졌다.

이런 판국에 의료세계화라니. 외국인 환자를 유치하고 해외로 의료기관이 진출하는 정책에 사활을 거는 꼴이 기가막히다. 정말로 세계화라면 보건의료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건데, 그건 또 아니다. 의료영리화, 의료민영화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만들어낸 엉뚱한 작명에 불과하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걸린 문제를 놓고 말장난을 하는 꼴이다. 해외가 아니라 국내를 들여다봐야 한다. 해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찾지 말고 국내 병의원이 지속 가능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의료환경을 바꿔야 한다. 외국에 병원을 수출하는 일에 앞서 의료취약지에 공공병원을 확충하는 게 먼저다. 의료관광산업 육성하고 해외에 병원 수출하는 건 세계화가 아니라 그냥 돈벌이 의료사업일 뿐이다. 낮은 공공의료 비중과 건강보험 보장률을 최소한 OECD 국가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진짜 의료세계화다. 

김상기 편집국 부국장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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