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미(영화평론가,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서울 G20 정상회의를 앞둔 작년 10월 31일 새벽. 한 남자가 서울 종로 일대를 돌며 G20 홍보 포스터마다 마치 쥐가 청사초롱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그림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그는 동이트자마자 경찰에 연행돼 72시간을 유치장서 갇혀 지냈다. 경찰은 그 남자를 ‘G20 방해공작범’으로 몰아세워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기각했다. 일명 ‘쥐 벽화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쥐 벽화'가 완성되던 그날 새벽부터 사흘간 그 누구보다 애간장을 태웠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쥐 그림'을 그렸던 남자의 아내인 황진미 씨(영화평론가,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다. 황씨는 이화의대(88학번)를 나와 가톨릭성모병원에서 수련의를 거쳤다. 지난 2002년에는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했다. 현재 한겨레신문 등 여러 매체에서 필진으로 맹활약 중이다.(본지에도 현재 '황진미의 라뽀&르뽀'란 제목의 글을 쓰고 있다.) 

황씨를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용산구 후암동을 찾았다. 그가 사는 동네는 고개를 빳빳이 세워 올려다봐야 겨우 남산타워 첨탑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약속 시간인 정오 무렵, 집 근처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그의 전화가 왔다. 날씨도 싸늘해 얼른 커피전문점 안으로 들어왔다. 10분이 지났을까? 커피콩 볶는 냄새에 정신이 팔렸다가 그가 들어온지도 몰랐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곳 커피가 맛있다며 기자가 마실 커피도 손수 추천해 줬다. 달콤쌉싸름하니 커피맛은 일품이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는 동안 황씨는 동네자랑을 늘어놨다.

“이 곳, 지역공동체 같은 느낌이 나요. 남영역 부근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른 데 살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저희 집으로 가는 골목 담장엔 누가 그린지도 모르는 벽화도 있어요. 재밌는 동네죠?”

“이런 멋진 마을이 서울 안에 숨겨져 있었다니. 이사오고 싶은데요. 아, 벽화 말씀하시니까 그 유명한 쥐 벽화가…그 얘기 먼저 듣고 싶은데, 대법원 판결이 얼마전 있었죠?”

남편이 쥐벽화를 그렸던 10월 마지막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 날은 제 생일(음력)이었어요. 저녁 늦게 들어와서 케익을 자르더니 중요한 볼일이 있다면서 급히 나가더라고요. 생일파티는 양력 생일로 미루자고 많이 미안해 했죠. 스프레이랑 몇몇 도구를 챙겨갔는데 쥐벽화를 그릴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날이 밝자 남대문경찰서에서 남편을 데리고 있다고 전화가 왔죠. 시트콤도 이런 시트콤이 없어요. 하하”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엔 적잖이 불안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쥐벽화 사건을 전후로 ‘우리나라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다고 털어놨다.  

“한국이란 나라의 법은 일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진 않아요. 쥐그림 사건 이후 1년 간 진행된 소송에서 패소하고서야 결국 깨달았죠. 예전엔 막연히 억울한 일이 생기면 고소해야겠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게요.”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법정르포’로 옮겨갔다. 법정르포는 그가 한겨레 '훅'에 기고하는 코너 이름이자 그녀가 개척한 장르다. 현재 그는 성상납을 요구받아 자살에 이른 장자연 사건 관련 소송을 취재하고 있다. 법정에서 오고가는 변론과 피고의 몸짓 하나하나를 재현하고, 거기에 날카로운 해석을 붙인 르포를 쓰고 있다. 같은 과 동기 여학생을 성추행한 고대의대생들의 처벌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법정 공방전도 그의 르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법정르포는 단순히 변론과 재판 상황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중요한 사회적 메세지를 전달해 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런 장르의 형식을 고민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쥐그림 사건 때문에 법원에 자주 갔었죠. 선고 공판이 있던 날이었어요. 아시겠지만,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고 소송 결과만 선고하잖아요. 수능 답안지 맞추는 고3 교실처럼요. 그런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판정 결과에 충격을 받았는지 격하게 오열하는 거예요. 같은 자리에 있던 전 무슨 사건인지 모를 수밖에요. 법원 경비는 지체않고 그 아주머니를 끌고 나가려고 했죠. 한 번 그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법정에는 권위를 요구하는 판사가 앉아 있고, 누군가는 오열하고, 그 사건과 관련 없는 다른 방청객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런 상황이 제겐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어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커피전문점엔 둘만 남겨졌다. 이젠 화제를 바꿔 사실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의사의 삶은 왜 포기하셨죠? 힘들게 수련과정 마치고 전문의도 땄는데, 후회는 없으세요?”

“사회와 소통하고 글을 쓰는 이 직업에 매우 만족을 느껴요. 너무 늦게 알았죠. 제 색깔을. 의대 시절도 갑갑했고, 전공의 시절엔 더 했어요. 온 몸이 쑤시고 안 아픈데가 없었어요. 신경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육체적 부작용이었죠. 흔히들 '사이코소매틱스'(psychosomatics)라고 부르죠.”

그는 더 깊은 이야기로 나아가기 전엔 항상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희극적 요소가 풍부한 인생스토리를 들려주는거다.

“사실 의약분업으로 인한 파업이 없었으면 전 어떻게해서라도 병원을 제발로 걸어나왔을지 몰라요. 파업 당시 전공의 4년차였죠.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 데 출구는 보이지 않았는데, 파업 대란이 시작됐죠. 파업 기간동안 병원 밖을 나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지가 많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그 무렵부터 글도 썼죠. 의사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어 끄집어낼 수 없었던 욕망들을 마구 느끼고, 실행에 옮기는 시간이었죠.”

그로부터 2년 후, 전문의를 취득하고 주 3일만 병원에서 업무를 봤다. 사유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이 허락되자 그는 날개를 달았다.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던 여름날 그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란 영화에 도취돼 사흘간 원고지 90매 분량의 영화평을 써버리고 말았다. 씨네 21에서는 그의 원고를 실으면서 ‘한 의사가 쓴 영화평’이라는 제목을 붙여줬고, 두 번째 원고부터는 영화평론가로 그의 이름이 올려졌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배워 보지 못한 채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어요. 제가 영화평을 쓰는 이유는 영화를 너무 사랑한다기 보다 복잡한 텍스트 안에서 간과할 수 있는 의미를 잡아내 풀고 싶은 거예요. 이 영화가 관객과 놓여 있는 자리에서 사회에 던지는 메세지가 이겁니다 라고 알려주는거죠. 그래서 꼭 영화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쥐벽화도 마찬가지죠. ‘잘그렸네’ 하는 식의 단편적인 평가는 문제가 있는거예요. 차라리 검사가 ‘국민과 아이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쥐그림이 있는 것은 국가 번영을 해치는 것’이라는 말에 더 진실이 있는거죠. 요즘 뜨는 ‘나꼼수’를 보고 나는 저런 말 대신 이렇게 말할거야라는 트윗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꼼수라는 텍스트가 유통되는 방식, 사회 내에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침투하는 현실에 눈을 떠야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고대의대생 성추행 사건도 사회에 던지는 충격파가 컸다. 황씨는 그 사건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피해 여성은 가해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잖아요. 그 여성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위치에 전혀 있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남자친구가 많았다’, ‘문란했다’라는 비난을 받은거예요. 의대 생활을 했으면 다 알겠지만, 무슨 원더우먼인가요? 고단한 의대생활을 하느라, 연애하느라 현실적으론 불가능하거든요. 선망과 질투가 개입된거라고 봐야 해요. 잘 나가는 여자가 문란하다까지로 번진거죠. 더 큰 문제는 소위 엘리트라는 그룹들이 성에 대한 지독한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다는거죠. 젠더주의적 발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해 엄숙한 척한다는 말이예요. 법정에서 변호사는 ‘양다리를 걸친다든가 남자친구가 있는데 남자친구를 사귄다든가’ 하는 식으로 묻다가 결국 ‘문란합니까?’라고 물었잖아요. 성 인지 교육이 유무식을 막론하고 너무 안 돼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

갑자기 커피전문점 음악이 비틀즈 노래로 바뀌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꼽시계도 요동쳤다. 무거운 사회 이슈를 자신의 삶과 연결해 진솔하게 인터뷰에 응해 준 그에게 감사했다. 유익했다. 무엇보다 그가 인터뷰 말미에 털어놓은 얘기가 가슴에 남는다.

“의사를 왜 포기했냐고요? 사실 봉사심이 없어서 그랬어요. 의사는 자신을 희생해서, 한 명의 환자를 돌보고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제 깜냥으로는 힘들더라고요. 장애인을 돌보는 복지사도,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도 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 아닐까요? 제 남편은 장애인 공동체를 돌보는데요, 중증장애를 겪는 아이가 자신만이 알아듣는 언어로 일장 연설을 늘어 놓는데, 전 5분 만에 귀가 닫혀버리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은 묵묵히 들어주는 걸 봐도 봉사심 부족한 제가 의사의 길을 빨리 접은 건 아무래도 잘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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