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 박형우와 박윤재 지음, (사이언스 북스 펴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뿌리를 찾아 나선 미국인 때문에 뿌리찾기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족보가 있어 뿌리를 제대로 간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은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뿌리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주류의학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 뿌리가 제중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가 각각 제중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 자리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동아시아국가들 가운데 일본은 이미 18세기에 이미 전통의학을 버리고 서양의학을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18세기면 유럽의 패권이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로 넘어가던 시절입니다.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서양의학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인 1543년 포르투갈 상선이 다네가시마에 기착했을 때  당시로서는 신무기라 할 소총 두 자루를 구입하고 불과 1년 만에 이를 모방한 조총을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를 감추려들었던 우리나라와는 다른 행보를 통하여 단숨에 동아시아국가들의 선두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서양문물을 일본이 처음 접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서양과의 교역이 열려 있었고, 우리나라 역시 중국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알고 있었지만, 국가경영에 이를 적극반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지난 해 초 <제중원>이라는 이름의 드라마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된 과정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을 쓰신 저자들께서 드라마 제작과정에서 많은 조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개화파가 주도했다가 실패한 갑신정변이라고 합니다.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의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전통의학이 포기한 상황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한 선교사 알렌을 치료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민영익의 주도로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의료기관으로 <제중원>이 1885년 설립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서양의학의 지식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서양의학이나 동양의학의 수준이라는 것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서양의학이 발전의 전기를 맞은 것이 르네상스시대였다고 한다면, 이미 17세기에 우리나라에도 전해진 서양의서를 통하여 서양의학의 가치에 눈을 떴을 것 같습니다만, 수용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1629년에 저술한 <주제군징>에는 갈레노스의 해부 생리학 이론이 소개되고 있었고, 이익의 성호사설(1760년)에도 ‘서국의((西國醫)’라는 제목으로 생리원칙, 혈액, 호흡 및 뇌척수 신경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정약용의 경우는 <의령(醫零)에서 음양오행의 이론을 의학에서 배제하였을 뿐 아니라 마과회통(1798년)에서는 우두법을 소개하기까지 했으나 이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지 않은 것입니다.저자들은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에서 고종황제께서 서양의학을 받아들인 과정 뿐 아니라 앞서 적은 것처럼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소개된 역사적 흔적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중원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치밀하게 뒤쫓고 있습니다. 의학, 간호학, 치과에 이르는 분야도 아우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경찰조직을 통하여 위생에 관한 제도를 세운 일,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한 우두법이 도입되는 과정, 치명적인 만성질환인 나병과 결핵 그리고 성병에 대한 관리대책이 마련되는 과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민간에서 의료를 주도하고 있고 사회보험의 성격으로 건강보험제도 아래서 관리되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의료는 왕조의 중요한 관심대상이었습니다. 백성은 국가경영의 바탕이었을터이니 백성의 건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의학을 전공한 의원이 민간의 영역에서 의료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혜민서 등을 통하여 국가에서 질병을 관리하는 부분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제중원(濟衆院)의 이름은 논어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국가가 백성에게 인정을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고종황제께서는 처음에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은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을 고려했다가 제중원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료에 대한 왕조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다음 지방에 설치한 자혜의원(慈惠醫院) 역시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무료진료 혹은 저가진료를 시행하다가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수익경영으로 전환하였다고 합니다.저자들은 심훈의 소설에 나오는 채영신이 “의사람 놈들이 있다 해도 그저 돈에만 눈이 빨갛지”라고 하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인술로서의 의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간이 주도하는 의료의 현실에서 인술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한가 싶습니다. 조선시대의 유의(儒醫)의 사례도 들고 있습니다. 유의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의학관련 서적을 통하여 익힌 의술을 사례를 받지 않고 동리사람들에게 베풀었다 해서 유의라고 불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의술을 업으로 하는 의원들은 사례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사마천은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편에 倉凜實而知禮節(창름실이지예절) 衣食足而知榮辱(의식족이지영욕) 禮生於有而廢於無(예생어유이폐어무)라는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의 말을 적었습니다.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예도 부끄러움도 알게 된다. 예의는 재물이 풍족하면 생기고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의료를 통하여 얻는 수입이 천차만별이라서 잘 나가는 분들도 계신 반면,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의사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중의 말을 다시 새겨보는 이유입니다.의술도 업인 세상입니다. 의술을 시행하는 의사들에게만 인술을 강요하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사실은 의사들 가운데 의료봉사에 나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다만 뉴스거리로 다루어주지 않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저 역시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했던 의료봉사 동아리를 통하여 시작한 의료봉사에 수십 차례 나선 바 있습니다. 저자들은 1934년 조선일보에 실렸던 장기무의 「한방의학 부흥책」을 인용하여 한의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IMS가 침술이냐”는 이슈로부터 한의학에서 현대의학의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등 의학과 한의학이 첨예한 갈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의학과 한의학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의료계와 한의계에 의하여 두 차례 제기된 바 있었지만, 각각 상대측이 수용하지 못하여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국가의 보건의료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어 효율적이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의료계와 한의계는 대승적 차원에서 의료일원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한의과대학에서도 커리큘럼에 현대의학을 배우고 있으며 방송매체 등을 통하여 한의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현대의학의 이론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한의학으로 돌아가곤 하는데, 동의보감에서 서양의학의 이론을 인용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현대의학의 술기를 통하여 진단하고 한의학적인 치료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기회가 되면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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