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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소리] ‘긴 두레박줄’ 같은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서재서재에 살다 /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작년 이맘때 천편 째 독후감을 썼습니다. 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그 책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예전에 집을 고치면서 작지 않은 규모의 책장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사무실에도 꽤나 규모가 되는 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책장에 넣지 못한 책들이 곳곳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읽은 책들이고, 글을 쓰면서 들춰보기도 합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는 바람에 쌓여있는 책들을 온통 뒤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면 오카사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을 읽을 책 목록의 위쪽으로 진입시키기도 합니다.

이사를 갈 때는 책을 싸고 푸는 일이 큰일이기도 합니다. 아내의 불만이 한계에 이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책들을 정리한 적도 서너 차례는 됩니다. 우리 상고사를 열심히 공부하다가 결국은 수십권의 책을 근무하던 부대의 도서실에 기증한 것이 그 첫 번째였고, 먼지가 쌓여가던 기백권의 전공서적들을 내다버리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관심분야가 아닌 책들을 사무실에 만든 ‘병아리도서실’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이 자유롭게 읽거나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해 다녀온 스페인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이슬람문명의 역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함마드 이후 성립한 우마이야왕조와 이를 이은 아바스왕조는 동으로는 인도북부까지, 서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지나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면서 이집트, 페르시아, 비잔틴, 인도, 그리고 그리스 등 다양한 문명들이 이슬람문명에 녹아들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왕조가 이들 문명이 이룬 업적을 수집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왕성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아바스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은 국립번역기관인 ‘지혜의 전당’을 설립해 번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후기 우마이야왕조의 수도였던 스페인의 코르도바에는 70여개의 도서관과 수많은 서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코르도바의 도서관은 44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의 전체 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보다 많았다는 것입니다.(윤용수 등, 지중해 문명의 다중성 11-47쪽, 이담북스 2010년) 이렇게 수집한 책을 읽고 연구한 이슬람문명은 오늘날 인류문명이 꽃을 피우는데  크게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일찍이 금속활자를 발명하는 등 인쇄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은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조선 지식인들의 서재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박철상님의 <서재에 살다>를 통해서 비록 실학파라고 분류되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 서책이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재라 하면 요즈음으로 말하면 개인의 장서를 모아두는 장소라고 제한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나아가 교유하는 벗들과 공유할 수도 있었을 터이니 사설도서관이라고 확대하여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 지식인의 서재로 제한을 둔 탓인지 조선조의 공공도서관에 관한 사항들은 언급되어 있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조임금의 서재 역시 개인의 서재로 규정한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의 출판문화의 형편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본격적인 출판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송나라 때 아미 수많은 민간 출판사들이 출현했다. 이를 토대로 다양하고 수준 높은 목판본들이 출판을 거듭했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21쪽)” 서적의 수요층이 한계가 있어 민간출판이 발달한 틈새가 없었고, 태종 시절 금속활자를 만들면서 관이 중심이 된 활자본 간행이 주류를 이루면서 국가정책에 맞는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되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임진왜란 이전에는 중국에서 간행된 책들이 곧바로 조선에서 간행되어 유통되었지만, 문화적으로 낮추어 보던 청나라 시절에는 이마저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등 활발했던 도서출판이 세월이 흐르면서 침체되었다가 정조시대에 들어 활기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조선조의 출판현황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서명응의 <규장자서기>의 한 대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종 시대에 만든 활자가 아마 대대로 나라의 보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옥처럼 모양이 고르고 반듯하여 그것으로 인쇄한 책이 몇 백만 권인지도 모른다. (…) 그러나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지키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보관하지 못해 없어진 것이 십중팔구나 된다. 우리 임금께서는 세손 시절부터 이를 안타깝게 여기셨다. (…) 이렇게 내각과 외각에서 전후로 주조한 활자가 모두 30만여 자였다.(23쪽)”

세종 이래 간행된 서책의 규모는 수백만 권이나 될까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정조 시절에 간행된 도서의 숫자가 153종에 3991권에 이를 만큼 ‘방대’하였다는 <군서표기>의 기록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1772년 정조는 은자 2150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청나라에서 간행된 백과사전인 5,002책이나 되는 거질의 <고금도서집성>을 사들였다고 했습니다. 정조임금의 서재인 ‘홍재(弘齋)’가 수장한 책자의 규모가 방대할 것임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서명응이 지은 홍재기(弘齋記)에서 왕세손 시설 정조가 “인을 체득한다는 것은 증자께서 말씀하신 ‘뜻을 크게 하라’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마침내 ‘홍(弘)’라를 공부하는 곳에 편액으로 걸었다.(17쪽)”라고 적은 부분을 인용하여 정조의 뜻을 새기고 있습니다. 정조는 서재를 그저 책을 모아두는데 그치지 않은 듯, 100책이나 되는 <홍재전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정조 무렵 서울에 생활의 터전을 두고 대대로 살아가던 양반 가운데 정치적으로 요직에 나갈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최상류층을 경화세족(京華世族)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들은 특히 청나라문물에 경도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특히 청나라에서 간행된 책자들을 앞 다투어 수입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간행된 서책만으로는 만권의 장서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심상규가 4만권, 조병귀와 윤치정이 3,4만권의 장서를 보유하는 등, 서울 오래된 집들 가운데 천 권, 만 권의 책이 있는 사람은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만들어놓고 유능한 중서층(中庶層) 인재들을 등용해 문화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경화세족 역시 비슷한 서재나 서고를 만들고 유능한 중서층 인물들을 겸인으로 부리거나 그들과 깊은 유대를 나누며 시대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에 서려고 했다.(181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여항문화(閭巷文化)로 치부하면서도 민간의 문화를 흥기하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설 도서관은 주인과 가까운 사람들만이 접근이 가능할 수밖에 없는 제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규모가 되는 공공도서관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조선의 지배층의 좁은 시야가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4만권의 장서를 자랑했다는 심상규의 가성각(嘉聲閣)은 심상규가 죽자 건물이 헐리고 장서의 행방도 묘연해졌다고 하니 서책의 수집도 어려울뿐더러 보관은 더욱 어렵더라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차라리 그 책들을 나라에 헌납했더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정조의 홍재에 이어 저자는 홍대용의 서재, 담헌(湛軒)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19세기 조선을 북학(北學)의 시대로 인도한 공을 기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통하여 공론화된 북학은 담헌 홍대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홍대용은 35살이 되던 1765년에 동지사 서장관이 된 숙부 홍억을 따라 연행에 나섰다고 합니다. 친구로 사귈만한 청나라 지식인을 찾아 헤매던 홍대용은 부장 이기성의 소개로 엄성과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사귀게 되었고, 귀국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멀리 떨어져 있던 조선과 중국 사이에도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경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엄성이 죽었다는 반정균의 부고에 홍대용은 애사(哀辭)를 짓고 향과 폐백을 갖추어 부쳤고, 마침 엄성의 대상을 치르던 날 도착하여 엄성의 가족은 물론 친지들이 감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반정균은 홍대용의 서재 담헌에 기문(記文)을 썼는데, “군자의 도는 마음에 잡됨이 없고 사물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몸은 청명(淸明)하고 그 집은 허백(虛白)하니 아마 ‘담(湛)’자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홍군은 매번 나와 성리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말이 아주 순정하였다. ‘담(湛)’자의 뜻을 체득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비록 문장력은 없지만 군자의 도에 힘을 써서 좋은 친구에게 지지 않도록 하겠다. 아울러 홍군의 문장과 덕행을 중국의 친구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인데 어찌 감히 별 볼 일 없는 솜씨라고 사양하겠는가?(45쪽)” 서재의 기문은 써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 자신의 문집에 실어 널리 알리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진정한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연행에 따라나선 홍대용의 진정성이 청나라 지식인들을 감복시켰고, 이들의 우정은 두 나라 지식인들을 감복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홍대용의 진정성으로 시작된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들의 교류는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조선의 19세기를 북학의 시대로 만든 첫 걸음이었던 것입니다.

북학의 시대를 여는데 홍대용의 담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 만큼, 박지원의 서재, 연암산방을 뒤에 두었다고 해서 연암이 섭섭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암을 논하면서 <열하일기>를 우선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터입니다. 열하일기를 읽다 보면 연암이 명나라와의 관계에 매이지 않고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봉황성에서는 벽돌을 구워 집과 성을 쌓은 모습을 보고서 돌로 쌓은 우리나라의 성과 비교하여 장단점을 논했다거나, 성문의 누각을 세우는 공사에서 사용하는 거중기가 신기한데 창졸간에 이를 배울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는 장면 등입니다.

저는 번역본을 읽어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당대에 이미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열하일기>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남수 같은 이는 “선생의 문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소설 나부랭이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순수한 고문(古文)은 사라져버릴 것입니다.(49쪽)”라면서 연암의 <열하일기>를 불태우려 들었다는 것입니다. 선비가 써야 하는 글은 이런 글이 아니라 순정한 고문인데 이런 글을 우리가 배워 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조 역시 당대의 선비들의 문체가 예스럽지 못한 것을 두고, 그 책임을 연암에게 물어 순정한 글을 한 편 지어 올려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토록 하라고 영을 내렸다고 합니다. 연암은 정조의 명에 따라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금의 서재, 기하실(幾何室)에 대한 내용도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4만권의 장서를 자랑한 심상규의 가성각(嘉聲閣)은 다양한 영역의 서책들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금의 서재는 천문과 역서에 관한 책들로 채워졌고, 주인 또한 육예(六藝)는 도(道)의 끄트머리이고 수학은 육예 중에서도 끄트머리라는 벗의 지적에도 부끄러워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금의 서재이름은 마테오 리치가 구술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을 서광계가 한문으로 기록한 <기하원본(幾何原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비들이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관심이 없을 때였음에도 유금은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에 대해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청나라를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던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조선의 선비들의 학문세계를 서재를 매개로 하여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직 이름을 붙일만한 장서를 갖추지 못했지만 저의 관심을 나타낼 수 있는 서재의 이름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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