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압축성장은 결국 부실성장…견고하지 못한 의료시스템

[라포르시안] '빨리 빨리' 문화는 의료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국민의 의료접근성을 가장 빠르게 개선한 국가로 꼽힌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10여년 만에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완성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긴 힘든 기록이다.

30~40년의 짧은 기간에 의료기관과 의료인력 등의 핵심 의료자원을 확충했고, 이제는 과잉공급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할 정도다.

속도만 빨랐던 게 아니다. 의료의 질적인 면에서도 눈부신 성장을 했다. OECD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건강지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OECD 헬스데이터 2013'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의사에게 외래진료를 받는 횟수는 13.2회(6.7회)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많고, 환자 1인당 병원평균재원일수는 16.4일(8.0일)로 OECD 평균보다 2배 더 길다.

건강상태를 나타내는 지표 중에서 출생시 기대수명은 81.1세로 OECD 평균(80.1세)를 뛰어 넘었고, 영아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3.0명으로 OECD 평균(4.1명)보다 더 적다.

암과 심뇌혈관질환에 의한 사망률은 OECD 평균과 비슷하거나 더 낮았지만 만성질환은 당뇨병의 유병률은 OECD 평균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해외 선진국들이 의료 분야에서 수백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를 우리는 단 수십 년 만에 완성한 셈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이러한 의료체계가 지속가능하냐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현재의 한국 의료체계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특히 한국경제가 60년대 이후 산업화를 통한 고도의 압축성장을 거친 뒤 겪게 되는 온갖 부작용이 의료 분야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소득 양극화와 실적주의와 편법의 성행, 그로 인한 안전불감증 등의 증상이 한국의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압축성장은 결국 부실성장…견고하지 못한 의료시스템   이미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의료이용의 양극화와 지역간 의료자원의 불균형, 인구 고령화와 의료기술 발전에 따른 의료비 급증, 비효율적 의료공급 및 이용체계, 그리고 시한폭탄을 떠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강보험제도의 난맥상 등이 서서히 한국의료의 목을 죄고 있다.

벌써부터 의료시스템 곳곳에서 붕괴의 조짐이 보였다. 

수도권에 의료자원이 집중되면서 지방의 의료공급체계가 붕괴되고 있으며, 분만과 응급의료 등의 필수의료시스템의 공백 상태에 빠진 지역도 적지 않다.

의료자원의 핵심인 의사인력의 수급 불균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먼저 산부인과와 흉부외과 등의 외과계열이 젊은 의사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분만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원정출산을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지방의 중증환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수도권 대형병원을 찾아 원정진료를 오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급기야 내과마저 전공의 기피과로 전락했다. 2015년 전공의 모집에서 내과가 처음으로 미달사태를 빚었다. 내과가 전공의 기피과로 전락하면서 의료시스템 전반에 걸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일부 지방 대학병원에서는 내과 전공의가 태부족해 중환자실과 응급실 등의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내과의 붕괴는 그 자체로 한국의료의 붕괴다. 살릴 수 있는 환자마저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상황이 오고 있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의료전달체계는 더 손쓰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다. 동네의원은 1차 의료기관으로서 게이트키퍼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보는 '박리다매 진료'와 비만과 성형 등의 비급여 진료에 매달린다. 서울시 전체 성형외과의원의 2/3 이상이, 피부과의원의 절반이 '강남 3구'에 몰려 있는 상황은 한국 일차의료의 피폐한 현실이다. 

대학병원은 끊임없이 병상을 확충하면서 몸집을 부풀리는 식의 성장을 지속해 왔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동네의원의 감기 환자까지 빼앗아오는 지경에 내몰렸다. 이제는 터무니없이 커진 병원 규모를 유지하지 힘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쟁을 멈출 수가 없다. 지금과 같은 의료환경에서는 외형성장을 멈추는 순간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동네의원과 대형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전달체계의 허리 역할을 담당해야 할 중소병원은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갈수록 줄어드는 환자와 그에 따른 경영난으로 의료인력 확보마저 힘들어졌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경쟁력은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고 급기야 폐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우후죽순 격으로 생격난 요양병원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2005년 1월 기준으로 120개에 불과하던 요양병원 수는 10년 만인 2014년 말 기준으로 1300여개로 늘었다. 

그 중 상당수가 의료인력이나 시설이 부실해 요양원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양병원은 가뜩이나 붕괴직전의 의료전달체계에 생긴 '허리 디스크' 같은 병증이다. 수술을 하기도 부담스럽고,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압축성장의 원동력 건강보험제도…'저부담-저급여-저수가'란 이름의 적폐 

건강보험제도의 지속 가능성도 확신하기 힘든 상황이다. 건강보험은 한국의료가 고도의 압축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만큼 훨씬 더 위태위태하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면 국민들의 보험료 납입 저항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완성해야 겠다는 속도에만 매몰된 탓에 보험료는 적게 내고, 보장성은 낮게, 의료수가도 낮게 지급하는 '저부담-저급여-저수가'의 3저 시스템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

지금도 변함없는 3저 시스템은 의료공급체계에서 수많은 문제를 낳았다.  앞에서 언급한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건강보험 가입자들은 낮은 건강보험 보장성 때문에 큰 병이라도 걸리면 ‘재난적 의료비’로 인해 빚까지 지고 질병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병원들은 낮은 의료수가로 인해 ‘3분진료’ 방식의 박리다매와 각종 비급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의료자원의 불균형 배치와 의료인력의 수급 불균형, 의료전달체계의 붕괴도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불거졌다.

2000년대 초반, 건강보험 재정 파탄 사태를 겪은 정부는 그 이후 건강보험 보장과 의료수가 책정, 의료자원 확충을 위한 정책 추진에 있어서 오로지 '보험재정 절감과 안정화'에 모든 초점을 맞췄다. 

보험재정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은 한국의료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적폐를 더욱 심화시켰다. 보험재정 절감을 위해 건강보험 급여기준을 강화하고, 임상현장과 동떨어진 비합리적 급여기준을 양산했다. 

'국민의 질병 예방을 위한 보험급여' 개념은 사라지고, 질병이 발생하고 심해질 이후에 급여 혜택을 제공하는 쪽으로 굳어졌다. 이런 건강보험 정책 방향은 병의원으로 하여금 진료 건수를 늘리고, 비급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결국 최종 피해자는 환자다. 더욱 치열한 환자유치 경쟁으로 내몰린 병원과 의사들은 생존을 위해 환자안전 불감증마저 드러내고 있다. 3저 시스템 속에서 병원의 몸집 풀리기와 시설 경쟁 속에서 환자안전을 위한 적정 의료인력 확보와 안전시스템 구축은 언감생심이었다. 

백혈병을 앓던 9살 종현이가 약물 투약오류로 숨지고, 유령의사에 의한 대리수술이 판치는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던 여고생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요양병원 화재 사고로 수십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의료 붕괴를 재촉하는 '의료영리화·산업화 정책'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한국 의료의 현안으로 건강보험과 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꼽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개선하고,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의료제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정부는 보건의료 투자활성화를 통한 의료산업화에 집착하고 있다. 의료업이 아니라 의료서비스산업의 관점에서 의료 부문에 외부 자본이 유입될 수 있도록 하고, 새로운 의료기기와 의약품이 더 빠르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의료관광과 병원수출을 통해 '의료세계화'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기관의 부대사업목적 자법인 설립 허용 및 부대사업 범위 확대 ▲의료법인간 합병 허용 ▲신의료기기 조기출시 지원 ▲해외환자 유치 촉진 등의 대책이 바로 그런 목적이다. 결국 다시 산업화다.

지난 수십년간 의료자원 확충과 의료보장제도 부문에서 압축성장을 했다면 이번에는 외료업의 외연을 확대하고 그 규모를 늘리는 쪽으로 새로운 압축성장을 시도하는 셈이다.

급기야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단체들의 건의로 '규제기요틴' 과제를 확정하고, 의료영리화를 위한 법제정과 의료인의 면허범위에 관한 민감한 부문까지 건들 모양이다.

의료계와 시민사회단체는 이런 정책이 가뜩이나 왜곡된 의료공급체계의 문제를 더 비틀고, 궁극적으로 의료체계를 붕괴시킬 것이란 우려를 제기한다.

지금의 한국 의료에서 중요한 것은 외형성장이 아니라 건강보험과 의료공급의 지속가능성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수십년간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생략한 발전 단계와 의료의 본질에서 벗어난 정책과 제도를 회복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나라 의료의 질은 선진국 수준이더라도 의료보장제도와 정부의 역할은 개발도상국 수준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료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되는 상황이 오면 '의료세계화와 산업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곁가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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