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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의약품·의료기기 ‘패스트 트랙’,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김상기 편집국 부국장
  • 승인 2014.12.1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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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르시안] 2008년 2월 '보건의료기술진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된 보건의료기술진흥법은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설립의 근거 조항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고 1년 뒤인 2009년 3월 NECA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보건의료 기술과 제품에 대한 경제성 분석, 임상효과 평가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의료소비자와 보험자, 의료기관에 제공하자는 것이 NECA를 설립한 목적이다. 이를 통해 의학적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신의료기술 및 제품의 시장진입을 활성화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지난 5월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기획재정부가 출범 4년차를 막 넘은 NECA의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회를 통해 기재부가 작성한 '고용·복지분야 기능점검 추진방안'이란 문건이 공개됐다. 이 문건에는 NECA를 폐지하는 대신 의료기술평가 업무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이관하고, 보건의료기술연구 사업지원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이관하는 식의 업무조정 방안이 담겨 있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일자 기재부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시한 것으로, 구체적인 사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명하며 일단락됐다.

현재 NECA를 폐지하는 방안이 어떻게 검토되고 있는지 알려진 바 없다. 그렇지만 이미 NECA의 기능은 상당히 축소될 상황에 놓였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5일 의료기기의 신의료기술평가를 생략하는 내용을 담은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의 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NEC가 수행해온 의료기기의 신의료기술 평가를 생략하고 임상시험을 거쳐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은 의료기기는 곧바로 건강보험 요양급여 신청이 가능토록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의료기기를 개발해 식약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은 후 의료법상 신의료기술의 안전성·유효성 평가를 거쳐야 건강보험의 요양급여 신청을 할 수 있다. NECA에서 담당하던 신의료기술 평가를 생략하면 신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의 시장진입이 1년 정도 빨라진다고 한다. 사실상 NECA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각에서는 기재부가 NECA를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이 이번 조치와 무관치 않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보건의료 분야의 투자활성화를 명분으로 이런 식의 규제 완화를 남발하고 있다. 의료기기의 신의료기술 평가 생략과 함께 신약의 건강보험 급여등재 기간 단축도 추진하고 있다. 대체약제의 가중평균가를 수용한 신약은 약가협상 적용 대상에서 제외토록 하는 관련 규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상태다. 이른바 신속등재절차((fast track, 패스트 트랙)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약제가 존재하고 효과 측면에서 혁신성이 없는 신약에 대해서 가격우대를 해줄 이유가 없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서 '패스트 트랙' 제도를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에서도 패스트 트랙 방식으로 허가를 받은 신약의 부작용 발생이 잇따라 보고되자 제도 보완은 물론 폐지론까지 제기된 바 있다.

미국 의약품안전사용연구소(Drug Safety Research)의 토머스 J. 무어 박사팀은 2012년 미국의사협회지(JAMA)에 "FDA가 신약을 신속하게 승인하는 과정에서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며 제도적 보완을 촉구하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당시 무어 박사팀은 대표적인 사례로 베링거인겔하임의 ‘프라닥사’, 아스트라제네카의 ‘카프렐사’, 노바티스의 ‘길레니야’ 등을 꼽았다. 실제로 베링거인겔하임의 경구용 항응고제인 프라닥사는 2010년 출시된 이후 치명적 출혈 등 수천건의 부작용이 보고됐다. 이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소송이 제기됐고, 결국 지난 8월 베링거인겔하임은 피해자들에게 총 6억5,000만 달러(약 6638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표준적인 허가 절차가 아닌 신속심사를 통해 허가받은 신약이 심각한 안전성 문제를 초래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연구팀이 1995년부터 2010년까지 현지 제약시장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캐나다에서 신속심사로 허가받은 112개의 신약 중에서 34.2%가 심각한 안전성 문제를 일으켰다. 반면 통상적인 허가절차를 밟은 신약에서 안전성 문제가 발생한 비율은 19.8%에 그쳤다.

외국의 이런 사례를 보더라도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의료기기 및 의약품 분야의 패스트 트랙 도입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4대악' 중 하나로 불량 식품을 선정하고 이를 근절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불량 식품보다 더 위험한 불량 의료기기와 불량 신약을 유통시킬 수 있는 규제완화를 추진한다면 상당한 모순이다. 현 정부는 '빨리 빨리'가 미덕인 양 포장하고 보건의료 분야를 비롯한 전방위에 걸쳐 패스트 트랙을 도입하지 못해 안달난 모습이다. '빨리 빨리'가 항상 미덕은 아니다. 때로는 최악의 악덕이 될 수 있다. 1957년 '무독성'을 강조하며 입덧을 멎게 하는 약으로 시판된 탈리도마이드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

김상기 편집국 부국장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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