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뷰] 힘든과 피하려 돈거래에 수련환경 개선 요구하며 파업…가장 큰 문제는 ‘이대론 미래 없다는 불안감’

[라포르시안]  전공의 수련교육 현장 곳곳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조짐이 일고 있다.

인턴끼리 힘든 과의 순환교육 스케줄을 회피하기 위해 돈을 주고 교육과정을 몰래 거래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수련환경 개선을 요구하면 레지던트들이 집단 파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수련교육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익혀야 할 임상술기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전문의 자격을 따고, 결국 무급 펠로우 등의 자격으로 또다시 수련병원에 남아 임상술기를 습득하는 상황까지 왔다. 

수련교육 시스템의 왜곡과 '값싼 의료인력'이란 질곡에 빠진 전공의들의 현실은 한국 의료시스템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음을 경고하는 전조증상이라는 우려섞인 시각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문제가 불거진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지겹도록 제기돼 왔다. 수면 아래 억눌려왔던 문제가 더는 감출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랐을 뿐이다.

▲ 지난 3월 10일, 의사 파업에 참여하기 위해 의사협회 회관에 모인 전공의들. 전날 근무를 마치고 병원에서 바로 달려온 전공의는 피곤한 듯 동아홀 맨바닥에 앉아 고객를 숙인 채 잠을 청했다.

피교육생인지, 병원노동자인지 헷갈리는 전공의들한국의 전공의들은 노동권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주당 100시간에 가까운 살인적 근무강도에 시달리면서 병원에서 입원환자 주치의부터 각종 검사업무, 수술 보조 등 온갖 일을 해낸다.

그럼에도 이들은 의사로서 정체성이 모호하다. 툭하면 환자들로부터 '전공의 말고 의사 불러오라'는 식의 대접을 받는다.

전공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중적이긴 병원 경영진으로 참여하는 선배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인건비 문제에 있어서는 전공의를 피교육생 신분으로 규정한다. 배우는 과정이니 인건비가 낮아도 된다는 인식이다. 업무에 있어서는 병원에 고용된 의료진으로 규정한다. 병원의 규정에 따라 주어진 업무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거다. 

수련교육 과정에 불만이라도 내비치면 "우리 때는 이보다 더 힘들었다"는 말부터 앞선다. 이러다 보니 전공의들도 병원 내에서 자신들의 신분이 뭔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전공의 2,014명을 대상으로 이중적 지위에 대한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2.7%가 '피교육생이자 근무자'라고 답했다.  '근무자에 가깝다'거나 '근무자'라고 인식한 비율도 44.2%에 달했다. 자신이 '피교육생에 가깝다'거나 '피교육생'이라는 응답은 고작 3.1%였다.   

모호한 정체성 속에서 선배의사인 교수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생긴다. 환자에게 멱살을 잡히거나 폭력에 노출되는 건 일상다반사다.

그나마 수련교육이라도 제대로 이뤄지면 다행일텐데 이마저 부실하다. 전문의한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임상술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전공의 수련을 마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내과 4년차 전공의가 내시경과 초음파 등의 술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나중에 개원을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값싼 의료인력'으로 굳어진 전공의

인턴과 레지던트는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 의사'라기보다는 '값싼 의사인력'으로 굳어졌다. 전문의 인건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값싼 비용으로 부릴 수 있는 저임금 의료노동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수련병원 입장에서 해마다 쏟아지는 수천명의 전공의는 매력적인 인력시장이다. 이렇게 값싼 의료인력 시장을 이용해 지난 수십년간 대형병원들이 몸집 불리기를 해 왔다. 만일 지금같은 수련교육 시스템과 전공의가 없었다면 대형병원들이 저렇게 비대하게 몸집 불리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내과 전공의 1년차 7명. 이들은 내과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촉탁의 고용과 수련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며 지난 2일부터 시작해 사흘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파업은 부실하고 왜곡된 전공의 수련교육 시스템을 상징한다.

7년의 내과 전공의 1년차가 파업에 들어간 이유는 당장의 과중한 업무량과 열악한 처우를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이다.

이들은 "촉탁의고용, 수련환경개선 등이 추진되지 않아 전공의 수급이 어려워 질 경우 내년에 발생할 인력 공백 및 이로 인한 환자진료의 지장을 우려하고 있다. 왜 내과에 지원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런 문제가 해결돼야만 내과의국이 발전하고 미래의 내과 지원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며 '힘들지만 함께 해보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호소했다.

지금처럼 열악한 수련환경이 지속될 경우 당장 내년에 내과 전공의 지원자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환자진료에 차질이 생기고 그런 환경에서 근무하는 자신들의 미래가 더욱 암울해질 것이란 우려 때문에 파업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됐다는 말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소속된 인턴들이 힘든 과의 순환교육을 기피하기 위해 돈을 주고 서로 스케줄을 사고 팔았다는 일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이 힘든 과라고 지목한 진료과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으니 돈을 주고서라도 피하고 싶은 거다.  

무책임한 정부, 생존에만 급급한 병원 경영자들수련병원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은 누구 책임일까. 다 병원과 정부 탓이다. 병원들은 저수가로 인해 환자에게 적정 진료를 제공하지 못하고 '1시간 대기 5분 진료'라는 박리다매 진료와 비급여 진료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공의 인력을 적극 활용해 인건비를 줄이고, 외래환자 유치 확대를 위한 병원 신증축, 의료의 본질에서 벗어난 수익사업 등의 경영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하기에 급급했다. 병원의 몸집은 점점 비대해지고 환자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주요 대학병원은 하루 외래환자가 1만명을 돌파했다고 자랑스럽게 홍보한다. 그렇게 병원 규모가 커질 때마다 전공의들은 부족한 의료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욱 숨가쁘게 병원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런 상태에서 수련환경이 좋아질리 없다. 인턴은 잡역부로, 레지던트는 수많은 환자의 주치의를 맡아 병동 곳곳을 밤낮없이 신출귀몰한다. 수면시간도 부족하고 만성피로 상태다. 수면부족과 누적된 피로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환자를 보다가 의료사고를 내기도 한다. 병원이나 선배의사들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방치한다. 오히려 전공의들의 노동력을 짜내는 데 골몰한다. 수련병원을 지정하고 전공의 교육시스템을 관리·감독하는 역할을 맡은 병원신임평가센터는 오히려 병원 경영자들의 눈치를 본다.

 

보건복지부는 병원경영자 단체인 대한병원협회에 병원신임평가 업무를 위탁해 놓고 제 할 일 다했다는 식이다. 복지부는 전공의 수련환경에 크게 관심이 없다.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등의 나라에서는 전공의 수련 비용을 정부에서 지원한다.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정부가 지원하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수련교육 문제에 사실상 관여할 일도 없다. 병원경영자 단체인 대한병원협회 내에 병원신임평가센터를 두고 수련병원의 관리·감독을 그져 지켜보면 된다.

전공의 근무시간에 제한을 두는 규정이 시행됐지만 의료인력을 추가로 고용할 여력이 없는 수련병원은 기존 근무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보고서를 날조하는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한다. 병원신임평가센터에서 이런 편법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관리·감독은 없다. 전공의 근무시간을 줄이면 지방 대형병원이나 중소병원은 의사인력을 충원할 수 없어 도산할 수 있다고 걱정한 곳이 대한병원협회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비정상적인 전공의 수련환경이 뚜렷한 개선의 여지 없이 지속되고 있다. 당분가 또 큰 문제만 불거지지 않는다면 이런 상태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대전협 송명제 회장은 "어떤 식으로든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은 결국 붕괴하게 된다. 지금 전공의들의 비정상적인 상황은 하나의 전조 증상이다. 우리 모두가 막다른 길에 도달한 의료 환경에 대해 국민을 설득할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고 다급한 목소리를 냈지만 메아리없는 외침이다.

지금처럼 비정상적인 수련환경이 내재된 문제를 감추고 유지된다면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환자다. 의료사고의 위험은 둘째치고 제대로 수련받지 못한 전문의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전공의 수련교육 환경을 갖추면 망하는 병원이 나올 수도 있다면 차라리 그러는게 낫다. 정상적인 수련교육 환경을 갖추고 병원이 환자에게 적정 진료를 제공하면서 유지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두 다 알면서 피하고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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