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지음 / 이재원 옮김 / 이후 펴냄, 2004년

[라포르시안]  이진숙님은 <위대한 예술책>에서 수전 손택을 사진예술 분야의 대표적 저술가로 지목했습니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은 세상과 만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라고 서문에 적은 것처럼 어쩌면 저자의 생각이 손택과 공명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진숙님은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가 ‘사진이 어떻게 근대적 시각을 만들어 갔는가, 또 자본주의 사회와 공모했는가?’에 천착하고 있다면, <타인의 고통>은 ‘어떻게 사진이 전쟁 미학을 위해 복무하게 되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진숙님의 이러한 시각이 불편하다면 1826년 최초의 사진으로부터 현대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예술의 발전과정을 뒤쫓고 있는 진동선님의 <사진예술의 풍경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위대한 미술책>에서 소개를 받은 ‘꼬리를 무는 책읽기’로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북소리]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로버트 베번의 <집단 기억의 파괴>와 함께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사진에 관하여>처럼 사진을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만, 9․11사건 이후에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지전쟁과 테러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포르노그래피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테러와 같이 잔혹한 상황을 담은 사진 역시 중독성이 있어서 반복될수록 시시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과대학생들의 해부학실습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는 해부학실습실이 옥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컴컴하고 우중충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부실습을 시작하는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습니다. 과거에는 실습 첫날 졸도한 학생도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주고받으면서 우리 반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올까 내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습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무거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실습시험을 앞두고는 밤늦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시험을 준비하느라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손택은 일생동안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를 일관되고 추적했으며,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쟁이 한참 진행되던 1966년에 <파르티잔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와 같은 날선 구절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와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 등을 폭로했다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서 저자는 전쟁과 테러로 점철되고 있는 지구촌에서 끝 모를 잔혹함을 보이는 인간들로 인한 연민이라는 알리바이를 페르소나로 하여 타인의 고통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하여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압도될 만큼 엄청나고 굉장한 상황)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14쪽)”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저자가 <타인의 고통>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료들은 중세에서 현대까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만, 저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은 보스니아 내전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발칸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보스니아내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대규모학살이 벌어진 치명적 전쟁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탈퇴로 촉발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과정에서 정작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장소는 힘없는 보스니아였습니다. 보스니아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그리고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보스니아의 독립선언이 계기가 되어 유고연방의 전 지역에 걸쳐 서로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모두 27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2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전쟁이었는데, UN은 전쟁 초기에 군사개입을 주저하였을 뿐 아니라 3만 명이나 투입된 평화유지군의 역할 역시 미미해서 휴전과 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는 것입니다.

▲ 2001년 11월 13일자 '뉴욕타임즈' 1면에 게재된 타일러 힉스의 사진. 2001년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시 촬영된 것으로, 아프간 북부동맹군에 붙잡힌 탈렌반 군인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촬영한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잔악한 행위는 사진에 담겨 외부에 알려졌는데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던 것은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도 않으며, 자국의 지도자들이 이 전쟁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153쪽)’이었다고 합니다.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로 싸우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고 한다면 강 건너 불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베번은 세르비아군이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대규모 포격이 있고서야 유엔과 유럽연합 그리고 서구 언론은 이를 세계의 집단건축유산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포격을 멈출 것을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고 적었습니다. 발칸반도의 이슬람 유산파괴에 상대적으로 미온했던 것에 비하면, 이 도시에 들어서 있는 후기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들이 서구 시청자들의 눈에 친숙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먼 곳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와 전쟁을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과거에는 사진, 더 이전에는 그림 등을 통해서 그 끔찍한 현장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46쪽)’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즉 ‘카메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말 그대로 렌즈 앞에 놓인 그 무엇인가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사진은 사라져 간 과거와 떠나 간 사람을 추억케 해주는 데 있어 그 어떤 그림보다도 탁월했다.’라는 것입니다. 카메라 이전에 그림으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걸작으로 저자는 자크칼로의 『전쟁의 비참함과 불운(1633년)』와 고야의 『전쟁의 참화(1820년)』를 꼽고 있습니다. 자크칼로는 1630년대 초 로렌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대가 민간에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18장의 동판화로 제작하였으며, 고야는 1808년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봉기한 스페인에 진주한 나폴레옹의 군인들이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83장의 동판화로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전쟁 사진이 태어난 최초의 전쟁은 크림전쟁(1853~1856)이었습니다. 로저 팬턴은 영국정부가 파견한 이 전쟁의 ‘공식’ 사진작가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인쇄매체들이 영국군이 겪고 있던 위험과 결핍을 부각시키고 있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쟁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사진기술상의 문제에 더하여 정부의 이런 요구가 있어 사진작가의 연출에 따라 포즈를 취한 장병들의 모습만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터의 참상이 사진에 처음 담은 것은 영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세포이 반란(1857~1858)에 참전한 펠리체 베아토였습니다. 인도 군인들의 도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영국군의 승리를 찬양한 것이지만 영국군의 포격으로 산산조각이 난 럭나우의 시칸다바그궁전의 안마당이 반란자들의 뼈로 뒤덮여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은 것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사진에 담기 시작한 것은 남북전쟁(1861~1865)에 참전한 매튜 브래디가 이끌던 북부의 사진작가들이었습니다. 분명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진들을 찍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리는 기록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다”라고 말한 것도 브래디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의 사진들, 심지어 걸작이라고 칭송을 받는 것들까지도 대부분 연출되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점령한 이오섬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유명한 사진 역시 시간이 지난 뒤에 더 큰 성조기로 재현하도록 해서 찍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오섬은 우리식으로는 유황도라고 읽어 유명한 섬입니다. 전쟁사진들이 연출되지 않은 채 찍히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부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손탁은 “이 점이야말로 한 세대의 의식에 아로새겨지게 된 이미지들이 지닌 도덕적 진정성의 핵심이다.(90쪽)”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사진작가들이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적 성실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 배경에는 텔레비전이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매체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사진작가들은 텔레비전 스태프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연출된 장면이 사진에 담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 사례로 저자는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학살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올 초에 갔던 캄보디아의 왓트마이 사원에서 희생자들의 유골과 함께 전시하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진에 찍혀 있는 희생자들은 마치 저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손택 역시 이 사진들에 대하여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직전에 처해 있고, 영원히 학대받고 있다.(96쪽)”라며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을 찍은 사람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셈으로 정말 구역질나는 경험이었다고 했습니다.

▲ 출처 : <타인의 고통> 중에서

전쟁터의 참상을 어떻게 전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사(戰史)를 통하여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죽은 자들을 전장에 효수하는 일이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린다고 해석하지만 때로는 적이 복수의 칼을 가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전쟁터와 후방의 개념이 모호해서 전쟁 지휘부가 고민하는 대중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미묘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피해자의 가족들에게는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거나 메스꺼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야드바셈,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그리고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관>과 같은 전쟁 기념관들이 집단학살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자료들이 기록한 범죄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고 재현될 수는 있지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단의 기억으로 전해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사진이야 말로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정신으로 챙겨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135쪽)”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사진 이외의 형태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퇴색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하겠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작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쟁에 매혹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있을까?(178쪽)”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줘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도록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저자는 의외로 전장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캐나다의 사진작가 제프 윌이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어진 전쟁을 주제로 스튜디오에서 찍은 『죽은 군대는 말한다(1992년)』를 반전(反戰)의 이미지로 인용하였습니다. 전장에서 죽어 쓰러져 있는 병사는 말하지 않지만,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말한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고발하는 듯한 이미지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사진 속의 병사들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려 말을 거는 듯한 상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이 어떤지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결국 사진은 우리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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