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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화의 Book소리] 충분히 애도하라,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 / 안 앙설렝 슈창베르제와 에블린 비손 죄프루아 지음 / 허봉금 옮김 / 민음인 펴냄, 2014년

[라포르시안]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를 모셨습니다. 발인하는 날이나 삼우제를 치루는 날도 그러더니 49제를 모시 동안에도 한바탕 비가 내렸습니다. 생전에 정리하지 못하신 무엇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의를 주관하는 스님이 눈물을 흘리거나 곡을 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누르고 있는 자식들의 슬픔을 하늘이 대신 나타내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제의를 주관하신 스님으로부터 유족들이 지나치게 슬퍼하면 영가께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제의는 근세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연종(蓮宗)의 인광대사(1862~1940)는「임종삼대요(臨終三大要)」에서 ‘절대로 임종인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움직이지 말고 또한 곡(哭)을 하지 말며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할 것’이라 했고, 남산율종(南山律宗)의 홍일대사(1880~1942)는 「인생의 최후」에서 ‘임종전후에 가족들은 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곡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조념염불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망인에게 실익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박병규 옮김, <왕생극락의 지름길>에서).

불교의 이런 입장을 타이완대학의 陳錫琦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헤어지고 죽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도 도움이 필요하다. (…) 먼저, 잠시 비통함을 참도록 인도한다. 떠날 사람 앞에서 지나친 슬픔을 표현하면 미련 때문에 편하게 최후를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 사후 8시간까지는 시체를 만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청정한 환경을 유지하여 죽은 사람을 어지럽히지 않고 바른 생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임기운 등 지음, 죽음학 153쪽)” 불교의 이런 관념은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 죽은 이의 극락왕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네 장례습속에는 장례는 물론 삼년상에 이르기까지, 망인에 대한 지극한 애달픔을 호곡(號哭)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곡비(哭婢)로 하여금 크게 울도록 했다고도 합니다. 일부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조성한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의 죄의식이나 망자를 애도하는 슬픈 감정이 녹아내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입니다. 상실에 관한 연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상실수업>에서 ‘왜 애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로 잘 애도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으며, 둘째로 슬픔은 마음과 영혼 그리고 정신의 치유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부정, 분노, 타협, 절망 그리고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퀴블러 로스는 이 다섯 단계가 상실과 함께 삶 속에서 배우게 될 것을 모아놓은 하나의 틀로서, 상실로 느끼게 되는 감정들을 선명하게 구별해주는 도구이지만, 각 단계가 순서대로 지나쳐야 하는 슬픔의 정거장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다섯 단계를 전부 겪거나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부정에서 수용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49재를 마쳐서 공식적으로는 어머님과 작별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에 먹먹한 느낌이 자리하곤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심리학자 안 앙설렝 슈창베르제와 에블린 비손 죄프루아가 같이 쓴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를 읽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이별이었기에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고통을 가슴에 품고 오랫동안 ‘살아오는’ 실수를 했기에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왔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상을 당한 사람을 위한 치유 의식’에 대한 글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충분히 애도하고 난 후에야 고인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게 된다. 하지만 슬픔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보살펴야 한다.(17쪽)”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거나, 위험한 행동을 해서 상처를 입는 등,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집중이 되지 않고 불안하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례식에 가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별의 순간에 했어야 했던 일을 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비탄에 빠진 남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 남자는 형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음껏 울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맺혀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죽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죽음에서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저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방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적 고통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신체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즉 몸이 느끼는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병으로 나타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생활 중에 겪는 스트레스 자가진단표’를 이용하여 몸이 알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조처를 취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 확실한 단 한 사람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늘상 자신을 돌보고 에너지가 넘치도록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살인사건과 관련된 상실에서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특별한 애도작업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2000년에 호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장한 청년 3명이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한 청년을 살해하고서 감옥에 갔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죽은 청년의 어머니는 슬픔을 삭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죽은 청년의 여자친구 역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범인들을 감옥에 보내는 처벌을 하였지만 범인들과 피해자 양쪽 모두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 호주경찰은 마오리족의 전통방식을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참여하는 ‘리얼 저스티스’라는 비공식적 협의회를 만들어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화장한 재를 넣은 가방을 범인의 무릎에 올려놓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어쩌면 감옥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영원히 절망의 감옥에 갇혀서 아들 때문에 울고 있어야 하는 형벌을 받은 나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101쪽)”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제야 범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깨닫고 피해자의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깊은 참회의 마음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  청년의 어머니와 약혼자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오리족의 방식은 ‘처벌하느냐 처벌하지 않느냐’는 이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제한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와는 달리 ‘회복적 정의’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나쁜 행동은 엄격하게 통제할 것을 권장하지만 사람을 통제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저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애도를 피하는 사람들의 사례도 소개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앞만 보며 달리고 성공하는 법만 배웠을 뿐 감정을 다스리고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109쪽)” 애도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슬픔에 대하여 언급을 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가 하면 죽은 사람을 절대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면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방과 물건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려는 일념으로 일체의 애도작업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말하지. 아니야,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 나는 애도를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다 아내를 잊으면 어떡하겠어.(117쪽)”라고 말하는 남자가 바로 이런 형에 해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애써 슬픔을 달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예를 보면, “(이혼한 경우나 작은 사고를 당하고 난 뒤에) 터무니없는 위자료를 요구하고, ‘작은 보상’ 내지는 ‘자그마한 보답’이라며 스스로에게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제공한다.(112쪽)”

국립타이완사범대학교의 李佩怡박사는 사별하고 남은 사람들이 슬픔을 조절하는 방법과 또 그들을 돕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임기운 등 지음, 죽음학 251-270쪽). 먼저 육체적, 심리적 영역에서 건강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여야 하며, 종교의 도움을 받거나 가족, 친지 혹은 전문가 등, 사회적 차원에서 도움을 얻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들을 돕는 데는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사별자가 자신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둘째, 사별자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고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고인이 없는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넷째, 사별자가 고인에 대해 정서적으로 재정립하도록 돕는다. 다섯째, 슬퍼할 시간을 준다. 여섯째, 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이해해 준다. 일곱째, 개인적 차이를 인정한다. 여덟째, 지속적으로 지지를 제공한다. 아홉째, 당사자의 방어기제를 찾아 대응형식으로 바꾸어 준다. 열째, 복합적 비탄반응에 대해 이해하고 전문가를 소개해준다.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의 저자들이 내놓은 해답은 바로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반드시 화해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용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용서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분한 마음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복수하고 싶은 욕망이나 증오심, 원한, 반감과 같은 마음이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고 우리가 마음속에 지녔던 부정적인 기운을 상대방에게 돌려보낸다(143-144쪽).” 그래서 용서는 아주 매혹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천년을 이어갈 것 같던 로마제국도 멸망했고, 그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도 무너져 내리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상실로 인한 슬픔도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엷어지면서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애도가 끝나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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