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석 교수(단국대의대 의료윤리학교실)

얼마 전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세브란스 병원 김 할머님의 연명치료 중지 요구나 최근 의료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리베이트 쌍벌제 논란 등은 일종의 ‘윤리논쟁’입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할 도리’를 윤리라고 정의한다면, 독자 여러분과 저의 삶의 모습 중 어느 하나도 윤리의 잣대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겠지요. 이쪽도 일리가 있고 그 반대편 주장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딜레마(dilemma)'라고 합니다. 몸이 아픈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이 치열하게 관계하고 있는 의료계에서도 크고 작은 딜레마 상황들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의료윤리문제는 중요한 정보가 의료인에게 편중되어있는 정보의 불균형과 내용의 전문성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잠시만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보면 환자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과 같이 비교적 가벼운 문제로부터 부족한 장기(간, 신장 등)를 누구에게 나누어줄 것인가에 대한 결정과 같이 무거운 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용들이 포함됩니다. 낙태, 배아복제, 안락사 등 의료윤리의 많은 주제들은 대부분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끝없는 토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소모적이고 무가치한 것처럼 보입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각각의 주장들 뒤에 종교적, 문화적 배경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내를 감춘 채 막무가내식 주장만 내세우기 보다는 다른 주장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우리 사회와 의료계에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제부터 필자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문제들은 어느 정도 정답(?)이 있는 딜레마 상황들에 관한 것입니다. 의료윤리문제에 정답이 있다는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구태여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리베이트 수수로 의사면허를 박탈당한 후배 공중보건 의사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의사’라 하면 ‘착한 의사’를 뜻하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내제한 윤리적 합의를 잘 숙지하고 실천하는 의사를 뜻합니다. 의사 자신도 나름의 가치관이 있겠으나 사회적 합의를 무시한 독단적 진료행위는 환자뿐 아니라 의사 자신의 직업적 생명을 위협합니다. 앞으로 본 꼭지에서는 평소 모르고 있으면 환자와 의사 모두 매우 난처한 경우를 당할 수 있는 필수적인 윤리사례(Survival Medical Ethics)들을 한 달에 한 가지씩 소개하고, 이 사례와 관련해 여러분의 소중한 생각들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 이달의 딜레마 사례 - 감기에 항생제 처방을 요구하는 수빈엄마 5살 된 수빈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어제 저녁부터 열이 나고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고 하기에 진찰을 해 보니 요즘 유행하는 감기에 걸린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해열제와 콧물을 마르게 하는 약을 처방하고, 물을 많이 먹이고 잘 쉬면 며칠 내에 좋아질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책상에는 대기 환자 기록지가 수북이 쌓여있어 마음이 급한데, 수빈 엄마는 최 원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원장님, 항생제도 좀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냥 해열제만 먹이려면 뭐하러 병원에 왔겠어요. 그냥 약국에서 약 사먹지요. 얘는 감기 한번 걸리면 오래가거든요. 좀 독한 약을 쓰더라도 빨리 낳게 해 주세요. ” 최 원장의 원칙은 감기에는 항생제를 처방하지 않는 것이다. 감기의 원인균인 바이러스는 항생제로 박멸되지도 않을뿐더러 자칫 내성만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도 아닐 뿐더러 만에 하나 감기가 아니고 진짜 항생제가 필요한 세균성 감염의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항생제 처방을 해?, 말어? <* '딜레마 사례 1'에 대한 여러분의 소중한 견해를 e메일(drloved@hanmail.net)로 보내주시면, 다음 호에 간략한 해설과 함께 소개해 드립니다.>


정유석은?

199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1993년 가정의학과 전문의

2001년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2011년 전공의를 위한 임상의료윤리 저술

2011년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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