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호(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

‘의료와 노동’을 주제로 한 칼럼 청탁을 받고 난 아무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응낙했다. 내가 노동조합에서 오랫동안 정책과 교섭, 전략기획업무를 하면서 사실 가장 하고 싶었던 주제가 ‘보건의료에서 노동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의료와 노동’은 일반적으로 잘 궁합이 맞지 않는 조합이다. 의료는 병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노동은 노동계는 물론 경영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이 두 단어가 함께 만나면 왠지 어색하고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 그만큼 의료계, 병원계에서 노동은 정책의 주요 대상이나 변수가 아니다. 의료에서 노동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일부 노조가 있는 병원을 제외하고는. 보건의료인력 중 면허등록자가 65만 여 명이고 그중 활동인력이 40만 여 명이다. 그리고 보건의료산업에 종사하는 총 노동자 숫자(의료인, 비의료인 포함)가 60만 명을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도 의료에서 ‘사람과 노동’ 문제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경영진이 병원 인건비 비중이 높아 경영이 어렵다고 할 때, 목표관리(MBO), 균형성과관리(BSC), 전사적 자원관리(ERP) 등 신인사 신경영을 추진할 때, 그리고 간혹 병원장 취임사에서나 잠깐 거론되곤 하는 것이 의료에서 노동의 전부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 기능재정립 또는 의료공급체계 개편 논의할 때 잠깐 노동을 ‘의료자원’이나 ‘인력수급’ 차원에서 언급한다. 병원 인력문제의 핵심인 직종 요구는 이해집단 당사자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아주 골치아픈 문제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이런 모습은 의료계 내부보다는 덜하지만 일반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복지 전쟁’이 한창이다. 무상급식 논쟁으로 서울시장이 낙마했고, 무상급식에 이어 무상의료 의제가 최근 상한가를 치고 있다. 2012년 선거에서 무상의료와 복지에 대한 정책이 없으면 후보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시대이다. 이런 시점에서 민주노총이 ‘노동존중 민중복지사회’를 들고 나왔다. 기존에 ‘노동해방’이라는 다소 과격한 용어 대신에 보다 부드럽게 ‘노동존중’이란 용어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노동문제의 중요성을 새롭게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복지국가의 핵심이 노동문제이고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해소 문제이고, 노동이 존중받고,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가 진정한 복지국가라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제기한 ‘노동존중’이란 의제가 이번 서울시장 야권후보단일화 논의과정에서도 다루어졌다. 그런데 후일담을 들어보니 야권단일후보를 만들기 위한 정책합의과정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제안한 ‘노동존중사회’ 를 공동정책협약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다른 후보들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노동존중사회’ 라는 너무나 당연한 단어조차도 야권 내부에서 부담스럽게 논의되었다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스스로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졌다는 곳도 이 정도인데 보수적인 여당 내부는 어떨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아직도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이 천박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난 우리의 ‘의료와 노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로 아래 통계자료를 자주 인용한다. 지난 3월 8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2010년 말 현재 우리나라 전체 의료기관수와 의료인력, 병상수, 특수․고가 의료장비 등록현황을 공개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한국의 병상수와 특수․고가 의료장비는 OECD 평균보다 월등히 많은 반면, 의료인력 숫자는 훨씬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병원들이 과잉 공급된 병상과 장비를 통해 환자들에게 과잉검사와 과잉진료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고,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환자안전과 충분한 의료서비스 제공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와 의료계가 그동안 인력문제에 그만큼 소홀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필자가 병원인력문제를 연구하느라 다녀온 영국과 독일,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훨씬 적은 병상의 대학병원임에도 불구하고 몇 배나 더 많은 인력들이 일하고 있었다.  

난 ‘의료와 노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로 ‘병원 이직률’을 자주 인용한다. 한 직장의 조직문화와 근무만족도를 보여주는 주요 지표로 이직율과 근속연수라는 것이 있다. 이직률은 직장인이 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는 비율을 말한다. 당연히 이직률이 낮고 근속연수가 높은 직장이 좋은 직장임은 자명하다. 병원의 경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간호사 이직률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병원별로 적게는 10-20%대에서 많게는 100% 가 넘는 병원도 있다. 한해 100명의 간호사가 입사하고, 또 다른 100명이 넘은 간호사가 퇴사한다는 말이다, 기가 막힌 현실이다. 희끗 희끗한 백발의 할머니들이 많이 근무하는 선진국 병원과 20대 젊은 간호사가 넘쳐나는 한국병원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얼마 전 필자가 직접 교섭에 참가했던 C 사립대학병원의 경우, 교섭자료를 보니 1년~2년 미만 근무자가 전체 병원에서 50%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병원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과연 이런 인력상황에서 환자에게 최상의 의료서비스가 가능할까? 오죽하면 신규가 많이 들어오는 3월에는 병원을 가지 말라는 병원계 속설까지 생겼을까. 왜 이렇게 이직률이 높을까? 그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병원에서 사람과 노동문제를 새롭게 풀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이야기를 무겁게 시작했나보다. 어쨌든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의료계와 병원계에서 사람과 노동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사회적 해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난 여기서 의료계에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그리고 국민들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현재 6.5% 수준인 GDP 대비 국민의료비(총보건지출)가 OECD 평균인 9.0%대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의료인력 또한 OECD 수준으로 확보하려면 지금보다 배 이상(60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앞으로 10년간 집중적으로 보건의료산업에 더 많은 재정과 인력이 투입된다는 것이다. 새롭게 투입되는 재정과 인력을 통해 모든 국민들이 차별 없이 의료혜택을 누리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의료계 종사자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한다. 정부와 민간, 공급자와 소비자. 병원 노사, 모든 직종이 힘을 모아야한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의료의 두 축인 ‘건강보험(재정)’과 ‘의료공급체계’에서 그것을 관통하는 인력문제, 노동문제, 사람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로 더 많이 소통하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환자중심, 노동존중 병원’, ‘내부고객과 외부고객이 함께 만족하는 좋은 병원’, 그런 ‘개념 있는 병원’을 통해 환자안전과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좋은 의료기관을 만들게 될 것이다. 나는 병원 현관에 내걸린 ‘고가장비, 최신장비 입하, 의료기관평가인증, JCI 인증 병원’ 이런 간판보다는 ‘비정규직 없이 정규직이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OECD 수준의 충분한 인력으로 보호자가 필요 없는 병원’ ‘환자안전 100%를 지향하는 병원’ 이런 광고를 보고 싶다.


이주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노동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국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 단장과 민주노총 중앙위원, '보호자 없는 병원 실현을 위한 연석회의' 정책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