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한 싸움>

[라포르시안]  오는 7월 18일이면 태안에서 사설 캠프 사고가 일어난 지 꼭 일 년이 된다. 병영 체험을 한다고 캠프에 참가한 다섯 명의 고등학생이 파도에 휩쓸려 실종된 사건이다. 어른들이 잘못해서 귀한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올해 2월 17일, 이번에는 경주의 한 리조트에서 체육관이 무너졌다. 신입생 환영 행사에 참석했던 대학생 아홉 명을 비롯해 모두 열 명의 젊은이가 숨졌다. 이 사건 직후에도 어김없이 ‘총체적 부실’이라는 비판이 무성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4월의 세월호 사건. 사실 ‘총체적 부실’이라는 말만 해도 엄청난데, 이조차 턱없이 모자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이없고 서글픈 진단이 매일 더 보태진다. 이런 ‘위험사회’를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단지 열 달 남짓에 이토록 많은 꽃다운 목숨들을 속절없이 보냈지만,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때때로 울컥하고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지만, 조금씩 기억이 바래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앞장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현실 정치는 이미 완전히 세월호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총리와 장관 후보를 보자니 내각은 과거 그대로, 또는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이럴 것 같으면 왜 바꾸려고 했는지, 세월호 사건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국회의원 보궐선거도 마찬가지다. 사건들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 참담한 사건들이, 그들의 정치에는 도대체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눈에 보이니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세월호 국정조사가 제일 한심하다. 사고의 진상을 드러낼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는 이미 철저하게 배반당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젠 그저 유가족을 더 아프게 하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싶다.

이대로 또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뒤돌아서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을 되풀이해야 할까. 지금대로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 여름 휴가철을 지나면 모든 기운은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 다시 무엇을 추슬러야 할 지 살필 때다. 수많은 희생을 딛고 새로운 사회적 원리를 뿌리내릴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가 아닌가. 그나마 덜 억울하기 위해서라도 그걸 잡아야 한다.

크건 작건 ‘사고’는 기존 체제를 위협한다. 자연 재해든 인위적 사고든 마찬가지다. 늘 체제의 정당성을 시험하는 것이 사고라면, 특히 그 자체보다는 피해나 후유증을 다루는 해결 과정이 일차적인 현장이다.

미국의 911이나 카트리나, 한국의 IMF 경제위기를 되새겨 보자. 기존 체제는 타격을 받고 동요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때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권력이 스스로를 더 강화하는 기회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번 세월호 사건까지 포함한다. 사고가 체제나 권력을 위협할 때 ‘그들’은 어떤 대응 방법을 택할까. 시공을 가리지 않는, 그래서 보편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전략 몇 가지를 보자.

우선 하나는 ‘시간 끌기’. 사고와 재해는 그 성격과 결과에 따라 흔히 정치적, 사회적 분노로 이어진다. 세월호 사건을 돌이켜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황하고 좌절하고 또 분노했던가.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시간 끌기만큼 좋은 대응 방법이 없다. 어떤 이는 냄비 끓듯 한다는 국민성까지 들먹이지만, 한국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2008년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왜 어떻게 촉발되었는지, 오래 분노하기는 어렵다.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전략은 그냥 지연시키는 차원을 넘는다. 영국의 정치학자 밥 제섭이 ‘시간 주권’으로 표현했듯이, 국가 권력(특히 행정부)이 사실상 모든 중요한 의사결정의 시기를 통제한다. 국정조사를 언제 할 것인지, 특별법을 언제까지 논의할지, 누가 결정하는지 생각해 보라.

사고에 맞서 체제를 방어하는 두 번째 방법은 사고를 ‘탈체제화’하는 것이다. 주로 원인과 피해, 대응을 개인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인을 처벌하고 개별 조직을 응징하는 ‘표적화’ 전략이 주로 쓰인다.

세월호의 선원, 회사, 그리고 그 사주는 이미 엄벌 대상이 되어 있다. 해양수산부, 해경, 그 산하의 공공과 민간 조직 역시 어떤 형태로든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임은 아마도 여기까지일 터, 체제를 위협할 수는 없다.

이들의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에 더해서 체제의 책임 또한 물어야 하지만, 익명의 체제는 좀처럼 처벌과 응징의 표적이 되기 어렵다. 개인과 조직에 초점이 맞추어져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가 되고, 이는 속도와 시간에 대한 통제와 흔히 결합한다. 체제를 보호하는 효과가 더욱 커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술주의적 신비화’를 세 번 째로 지적해야 하겠다. 모든 사고가 그렇지만, 경과는 복잡하고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연결하는 것은 아주 힘들다. 경주 리조텔의 지붕이 왜 무너졌는지 원인을 한 가지만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래 건물이 부실해서 그런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랬는지, 사람이 잘못한 것인지,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과관계를 둘러싼 모든 관련성은 무 자르듯이 경계가 나눠지지 않는다. 세월호가 왜 그렇게 빨리 기울었는지 설명은 여전히 복잡하고 모호하다. 대책이라는 것도 온갖 상황에 둘러싸여 복잡하긴 매한가지다. 이런 사정들이 겹치면 비전문가는 감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는 전문성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갈수록 설명이 더 복잡해지고 흔히 지루한 논쟁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담화는 탈(脫)정치화, 비(非)사회화되고 과학과 기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원인 찾기가 어려울수록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다.

지금까지 사고와 그 결과에 맞서 체제와 권력을 보호하는 몇 가지 장치들을 살펴보았지만, 세월호 참사 역시 이런 장치들이 진작 작동하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막상 아무 일 없는 듯 거뜬하게 복원된 것은 세월호가 아니라 현 체제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상태로 그냥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견뎌야 할까. 최소한을 바라더라도 ‘구체제’가 그대로 복원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우선은, 많은 이가 말하듯, 잊지 말 일이다. 기록이 되었든 기념관이 되었든 망각에 저항해야 한다. 모두가 단 한 가지라도 말하고 기억하는 일에 나서자. 이것이 분노의 원천이고 변화를 이끌어낼 힘이다.

또한 시간에 대한 주권을 국가와 행정부가 독점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상세하게 참여하고 결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사회적, 정치적 압력이야말로 그 견고한 독점적 주권을 흔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 사고에 대해, 그리고 아직 잊지 못한 다른 사고도 함께, 개인을 넘어 문제를 ‘체제화’해야 한다. 체제화란 개인이 아닌 체제와 구조, 환경, 과정의 관점에서 이 사고를 본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의 잘못을 묻는 일조차 체계 속에서 그 무겁고 가벼움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코앞의 과제는 제대로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대로’에는 체제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을 당연히 포함하지만, 단지 기술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것 – 민주적 통제 –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한 진상 조사에 초점을 둔 가족대책위의 특별법안을 지지한다. 아울러 법 제정을 위한 협의 과정에 이들 가족이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곧 정부와 여야 정당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또다시 불행한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국가와 사회의 어떤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재빨리 회복되고 회귀하고 있다. 이 교착의 시기에 한 걸음이라도 진보하려면 이제 그것과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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