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 선서 : 반덕진 지음

 


<라포르시안>의 부탁을 받고서 고심 끝에 사이언스북스에서 나온 반덕진 교수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골랐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라포르시안’ 출범의 의미를 새기고, 작금의 의료계의 이슈를 짚어보기로 한다면, 의사들이 의술을 펼치기 시작할 때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에 새겼을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첫 서평 작품으로 선택했다.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위원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졸업식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히포크라테스선서의 내용이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학파에서 사용하던 <선서>의 원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흔히 알고 있는 <선서>는 1948년 세계의사협회가 2500년전 그리스시대의 원본을 당시의 감각에 맞게 손질한 수정본으로 <제네바 선언>이라는 것이다. 원본에 담긴 기본적인 정신은 어느 정도 살아 있지만, 내용이나 표현은 원문과 다르고 후세의 학자에 따라서 원본의 의미에 대한 해석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원본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서홍관박사님이 번역하여 아침이슬에서 출판한 자크 주아나교수의 평전, <히포크라테스>를 통하여 처음 소개를 받은 바 있지만, 내용에 있어 반덕진교수의 번역과도 다소 차이가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한 장도 되지 않는 짧은 문헌이지만, 의학의 이상과 원리가 촘촘하게 수놓아진 아름다운 문서이다. 그동안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서양 의학의 원형을 새롭게 발견한 이 책을 통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압축되어 있는 불멸 의학의 정신을 만난다”고 적은 사이언스북스의 책소개는 짧지만 명료하다.. 히포크라테스를 의성(醫聖)이라 칭하며 서양의학의 시조(始祖)로 삼게 된 것은 당시에 이르기까지 동양의학보다 나을 것도 없는 미신적 주술의학과 신전에 의탁하여 신병을 고쳐보려는 고대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합리주의, 자연주의, 인본주의 정신을 불어넣어 과학과 철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덕진교수는 한 장 정도 분량의 <선서>를 뒤집어도 보고 쪼개도 보면서 한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다. 1부에서는 <선서>가 탄생한 시대적 배경을 선서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시대의 참고자료까지 섭렵하여 살펴보고 있다. 2부에서 4부까지는 선서의 순서에 따라 시작기도, 계약의 내용, 선서의 내용, 의사의 이상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선서에는 의학(醫學)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치료에 관한 학문 혹은 지식으로서의 의학(醫學)과 기술 혹은 행위로서의 의술(醫術) 그리고 덕목이나 윤리로서의 의덕(醫德)입니다. 이론적 측면으로서 의학과 실천적 측면의 의술 그리고 도덕적 측면의 의덕이 삼위일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반덕진 교수는 선서를 모두 9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단락은 신들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으며, 2단락에는 의사로서의 계약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3-8단락에는 선서의 중심사상이 담겨있는데, 3단락에는 의사의 정신 혹은 원칙을 이루는 의학의 주체, 의학의 목적, 치료의 방법 등이 압축되어 있다. 4단락과 6단락에는 의술에 대한 내용으로 의사로서 피해야 할 사례를 적시하고 있다. 5단락은 의사윤리의 대원칙을 7단락과 8단락에는 의사가 지켜야할 윤리적 사례로 환자와의 성관계금지와 환자의 비밀준수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최근 진료과정에서 여성 환자를 성추행한 의사에 관한 뉴스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진료과정에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여성 환자에게 의료행위를 넘어선 성적 일탈행동을 한 의료인은 분명 지켜야 할 금도를 넘어선 것이라 하겠다. 제네바선언에는 담겨지지 않았지만 의료인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망각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원본에는 관련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번역자에 따라 다소 뉴앙스에 차이가 있다. 서홍관교수의 번역본에는 “특히 자의거나 강제적이거나 여자나 남자의 신체를 모욕하는 일을 삼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반덕진교수는 “특히 노예든 자유민이든 여자들이나 남자들과 성적 접촉을 삼가겠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조항이 선서에 포함된 것은 요즈음의 의료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왕진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의료인의 성적일탈이 사회적 경계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으면서 이들의 면허를 박탈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다. 아마도 의사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상대적 약자인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법으로 차단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다만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정보를 사회적으로 공유하자는 제도에 대해서 당사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춰본다는 지나치게 앞서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또한 관련법을 실제 적용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의료인이 사회적 약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진료를 처음 시작할 무렵, 여자 환자를 진료할 때는 반드시 제3자를 동반하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이유는 뜻하지 않게 볼 수도 있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범죄와 관련된 선배의사들의 일탈된 행동을 엄격하게 규제하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최근 동급생에게 성추행을 한 의과대학생들이 몰아치는 여론의 압박으로 사법적인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출교를 당하는 사태로 이르게 하였다. 그 학생들의 행동을 옹호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젊은 그들이 받을 충격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말씀드리려는 것이다. 소설가 민태원은 수필 <청춘예찬>을 통하여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라고 젊은이의 역동성을 찬미하고 있다. 문제의 학생들은 민태원의 바람대로 ‘청춘의 끓는 피를, 빛나고 귀중한 이상’으로 향하지 못하고 일탈의 길에 빠져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다면 잠시 마비된 이성 때문에 벌린 일 때문에, 큰 뜻을 세우고 정진해오고 이제 의사로서 자리매김할 마지막 단계에서 좌절하게 된다면 그들이 또 다른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기억한다. 학업에서 중도탈락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삶을 기록한 성장소설이다. 주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 자신이 마치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 달팽이와 같다고 생각한 주인공 한스가 자신을 죽음의 길로 이끌고 만 것에 주변사람들의 책임은 없을까? 저들 젊은이들이 순간의 일탈로부터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바로잡아주는 일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반덕진교수는 의료계의 속사정까지 속속들이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감기 항생제 사용문제, 2000년 의약분업사태 등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던가, 히포크라테스학파가 중시했던 섭생에 대한 의료계의 무관심을 지적하시는 점들은 기회가 되면 다시 짚어보기로 하겠다.

 

언젠가부터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생각하게 된 오늘날의 의학과는 달리 신체적 질병이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의사들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박 교수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의학은 몸의 철학이고, 철학은 영혼의 의학이다.”라는 박덕진 교수의 말씀처럼 의학을 인간중심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양기화의 북소리>를 의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공간으로 가꾸어나가도록 노력하겠다.


양기화는…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