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안 브리핑]

[라포르시안]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진단 참고서인 국제 질병분류서(ICD)의 F66.0조(條)에는 '성적성숙장애'(sexual maturation disorder)라는 질병명이 있다. 외견상 정식 질병명인 것처럼 보이는 이 용어는 일종의 '심리학적 질환(psychological condition)으로, 불확실한 성적 지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울증 또는 불안증'으로 정의되어 있다.

"동성애를 단지 미성숙한 성 발달 상태로 간주하는 프로이트 이론에 따라 청소년 동성애자들은 '성적성숙장애'라는 정신질환 보유자로 낙인찍힌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순되거나 혼란스러운 성욕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UCLA의 수전 코크런 교수(역학)는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성 발달이 선형경로(linear trajectory)를 경유하여 이루어진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침내 WHO의 위촉을 받은 자문위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발표된 심리학 및 역학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국제 질병분류서 F66.0조와 기타 4개 조항에 포함된 `동성애 관련 심리학적 질환`의 질병명을 ICD에서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지난달 발표된 보고서에서 자문위원회는 "성적 지향을 기준으로 하여 질병을 분류하는 것은 과학적·임상적·공중보건적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실무작업을 지휘한 코크런 교수는 "그 같은 질병분류 방식은 과학적 근거나 임상적 유용성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인권보호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존스홉킨스 블룸버그 공중보건대학원의 크리스 베이러 교수(역학)는 "WHO 자문위원회의 보고서는 이제 몇 단계의 심사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중에는 170여 개 WHO 회원국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표결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동성애를 질병이나 범죄로 간주하고 있는 국가들의 엄청난 반대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러 교수는 "최근 러시아, 우간다, 나이지리아 등에서 통과된 반동성애법(anti-homosexuality laws)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감안할 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 같다. 차제에 WHO는 분연히 일어나 증거 기반 접근방법에 근거하여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170여 개 WHO 회원국들은 ICD 분류기호를 이용해 의료기록, 역학연구, 보험업무 등을 수행하고 있다. 뉴욕 메디컬 칼리지의 잭 드레셔 교수(정신과학)는 "'모든 성적 지향 관련 장애(sexual orientation–related disorders)에 관한 용어를 ICD에서 제거하라'는 WHO 자문위원회의 권고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미국 정신과협회(APA)는 `동성애를 정신장애로 간주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바 있다"고 말했다.

1974년 APA는 '정신장애에 관한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에서 동성애에 관한 질병명을 제외했지만 그 대신 일종의 정치적 타협안으로서 '자아 이질적 성적 지향'(ego-dystonic sexual orientation)이라는 괴상망측한 용어를 탄생시켰다. 자아 이질적 성적 지향이란 `동성애 감정이나 성적 지향을 바꾸고 싶은 욕망과 관련하여 느끼는 우울증 또는 불안증`을 의미한다. 예컨대 남성과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여성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녀는 '자아 이질적 성적 지향 환자로 간주할 수 있다.

드레셔 교수는 "현재 ICD에도 등재되어 있는 자아 이질적 성적 지향은 즉흥적으로 탄생한 용어에 불과하다. 1987년이 되어 자아 이질적 성적 지향을 지지했던 임상의들이 대부분 APA를 떠나자, APA는 성적 지향과 관련된 질병명들을 모두 DSM에서 삭제했다"고 말했다. 드레셔와 코크런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ICD에 대해서도 DSM과 유사한 운동이 펼쳐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1990년 ICD는 동성애를 질병명에서 삭제한 바 있다.

코크런은 "지난 20년 동안, 5개의 진단명(성적 지향 관련 장애)에 대한 연구결과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진단명들은 WHO 회원국들이 WHO에 보내는 정례 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으며, WHO가 발표하는 글로벌 질병부담 계산에 반영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증거에 입각해 WHO의 자문위원회 보고서는 임상의들에게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우울증과 불안증을 치료할 때는 여느 우울증 및 불안증 환자를 치료할 때와 동일한 태도로 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코크런은 "동성애자를 성적성숙장애 환자로 간주할 경우, 전향치료(conversion treatment)를 정당화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전향치료는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일상적인 학대와 편견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호도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드레셔는 이번 보고서가 동성애자를 박해하는 나라에서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이 반(反)게이법안에 서명하려 할 때, 그에게 동성애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무세베니는 어용 과학자들을 동원하여 드레셔의 서한을 검토하게 한 후, 드레셔의 설명과 반대되는 결론을 내려 버렸다. 드레셔는 "이 같은 마녀사냥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과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자문위원회의 보고서가 발표된 후 WHO는 2차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2차 심사위원회에는 동성애가 범죄시되고 있는 국가들(예: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의 과학자와 의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WHO에서 ICD 개정작업을 이끌고 있는 제프리 리드에 따르면 2차 심사위원들 중 성적성숙장애라는 용어를 폐지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다만, 드레셔에 의하면 이란 출신의 한 심사위원이 "동성애자를 '성적성숙장애'로 진단할 경우 정상참작을 통해 동성애자가 실형을 받거나 처형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각국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러한 방식으로 동성애자가 구제된 사례는 한 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제 자문위원회의 합리적인 권고안이 발표된 만큼 WHO는 멕시코, 브라질, 레바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나라에서 광범위한 현장조사를 실시해 새로운 진단기준이 제대로 시행되는지를 확인할 방침이다. WHO에서 ICD 개정작업을 이끌고 있는 제프리 리드는 "자문위원회의 권고가 과학적 증거에 입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자동적으로 설득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최고의 증거들을 수집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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