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 OECD의 <건강 데이터>가 말하는 것>

[라포르시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정리한 <2014 건강 데이터>(통계는 2012년 기준)의 한국판이 발표되었다. (관련 자료 : 보건복지부 보도 자료) 건강과 의료 수준을 나타내는 통계는 늘 차고 넘치니 눈에 확 뜨이는 뉴스는 아니다.

그래도 이 통계가 갖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매년 발표되는 데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한국의 수준이 어떤가를 보여준다. 비교 대상이 34개 OECD 회원국이니 비교적 현실감이 있다는 것도 사줄 만하다.

늘 그렇듯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통계는 몇 가지 안 된다. 이번에도 앞이든 뒤든 1, 2등을 다투는 것들, 예를 들어 자살률이나 흡연율 같은 정도나 관심사다. 그마저 비슷한 소리를 하도 여러 번 들어 그런지 반응은 심드렁하다.

매년 반복되고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발표에도 언론 보도에도 중요한 것이 빠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이 짧은 논평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것만 살펴보려고 한다.

많은 지표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흔히 지나치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하겠다. 바로 변화의 '속도' 문제다.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나, 건강과 의료 역시 어떤 나라보다 변화 속도가 빠르다.

수명이나 다른 건강 수준도 그렇지만, 의료 장비나 병상, 의사, 진료 횟수 등이 모두 마찬가지다. 특히 양적인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건강과 의료에서도 '압축 성장'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속도를 실감하기 위해 한 가지 연습을 해 보자. OECD의 <2014 건강 데이터> 사이트 가운데에 각 나라의 평균 수명을 전체 평균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다음 사이트가 그곳이다. (바로 가기)

왼쪽의 그래프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이 평균값이고, 오른쪽은 평균적인 증가 추세를 보여준다. 이제 한국을 표시할 차례. 위쪽의 국가 선택에서 한국을 찾아 누르면 모든 그림에 붉은 색 막대와 선이 표시된다.

이 연습 문제의 답은 첨부한 아래 그림과 같다. 오른쪽이 평균치와 비교한 한국의 추세인데, 한눈으로 보아도 속도가 완연하게 다르다. 특히 여성의 평균 수명 증가가 더욱 두드러진다. 평균 수명이 이런 속도로 빨리 늘어난 결과가 바로 급격한 인구 고령화다.

변화의 속도를 문제 삼는 이유는 사회적 대응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정책이든 무엇이든 문제를 파악하고 실천에 나설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 그리고 '지체'가 불가피하다. 시간이라는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데 속도가 빠를수록 일을 그르치기 쉽다.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현재 수준만큼이나 5년 또는 10년, 20년 후의 변화를 내다본 준비가 중요하다. 정부 정책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떤 분야보다 국가 정책에서 '속도 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하겠다. 저출산 정책이라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실제 사례를 기억할 것.

<2014 건강 데이터>에서 읽을 수 있는 또 한 가지 두드러진 현상은 상대적인 '저비용' 구조이다. 비교적 적은 비용과 투입으로 꽤 괜찮은 효과와 결과(적어도 몇 가지 거시 건강 지표에서는)를 얻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 인력의 숫자가 적고 비용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아직 덜 쓰는 편이다. 병상과 장비, 약품 비용은 많지만 전체 비용은 OECD 전체 평균보다 상당히 낮다(증가 속도는 약간 더 빠르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의사나 병원은 많은 국민들이 낮은 가격(수가)으로 의료를 '충분히' 이용한 덕분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다(의료인과 병원이 '희생'했다는 주장이 보태진다). 국민건강보험이 잘 해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와 분석, 그리고 거기에서 산출된 지식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이런 설명으로는 모자란다. 평균 수명이나 영아 사망률과 같은 건강 지표가 좋아지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의사나 병원(의료)보다 훨씬 많은 요인들이 한꺼번에 작용한 결과다. 특히 소득, 교육, 환경을 비롯한 이른바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겉으로 보이는 저비용 구조는 경제 발전과 교육 수준 향상, 그리고 다른 사회적 환경 개선에 크게 의존한 것이 된다.

지금까지를 해석하는 것보다 앞으로 저비용 구조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건강에 기여한 실제 원인이 값싼 의료 서비스든 또는 효율적인 건강 보험이든, 아니면 경제나 교육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쪽도 '지속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건강 수준이 좋아지는 속도는 점차 느려질 것이고(결과의 체감), 비용은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비용의 체증). 과거의 성장 모델은 점점 더 한계를 드러낼 것이 분명하다(앞서 말한 속도 문제까지 보태지면 더욱 심각하다).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지거나 그렇지 않으려면 비용 부담이 훨씬 더 늘어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새로운 대안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대로 대안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부터라도 함께 성실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4 건강 데이터>가 말하는(어쩌면 말하지 않는) 또 다른 특성은 건강의 '질'이다. 이유야 무엇이든 한국인의 건강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여성의 평균 수명은 앞에서 여섯 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선진국'이다.

그러나 건강의 질도 그 등수만큼 높을까. 물론 무엇을 질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하지만 몇 년째 일등을 놓치지 않는 자살률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그래도 전체로는 오래 살지 않느냐고,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있다. 이번 한국판 자료에는 없지만, 한국인이 스스로 평가한 '주관적' 건강 수준은 딴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소득이 낮든 높든 마찬가지고, 남녀의 차이도 별로 없다(자세한 자료는 OECD 사이트를 참조할 것). 나남 없이 다들 스스로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지표가 건강의 질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인지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이렇게 길어도 사람들이 느끼는 건강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건강에도 양과 질이 나누어진다면, 그 사이에 넓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본 것을 종합해 보자. <2014 건강 데이터>가 말하는 한국인의 건강 현실은 얼마간 혼란스럽다. 음주와 흡연율은 평균보다 훨씬 높지만 평균 수명으로 보면 다른 나라보다 더 오래 산다. 의사 수는 평균보다 적어도 의사와 병원을 찾아 진료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가 전체의 의료비 지출은 그리 많지 않으나 개인이 부담하는 의료비는 여전히 많고 부담스럽다.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살률은 변함없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자표들에서 일관성을 찾는 것은 어렵다.

솔직하게 말하면, 현황을 넘어 해석하고 원인을 찾는 것은 오늘 논평의 범위를 넘는다. 하지만, 약간의 비약과 상상을 보태더라도 실마리 정도는 찾아야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좀 더 넓고 깊은 작업은 여러 사람이 서로 도와야 가능한 일이다).

잠정적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리하면, 건강과 의료 현상들은 '발전 국가' 모델에 따라 틀이 만들어지고 또한 일부 실현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간단히 봐도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을 서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주도와 총체적 개입, 양적 성장, 자원과 자본으로서의(또한 계발되는) 개인,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의 경제화와 효율성의 절대화. 여기에 새로운 환경과의 부조화와 모순이 더해지는 모양이다.

잊지 말 것은 건강과 의료는 발전 국가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는 발전 국가가 가능하도록 한 투입 요소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나타나는 외형상의 혼란과 상충은 당연하다.

이런 전제가 어느 정도 맞는다면 필요한 일은 조금 더 근본으로 돌아간다. 다름 아니라 수명이 다한 낡은 사회 발전 모델을 대신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분야가 같이 안고 있는 숙제인 만큼 건강과 의료도 예외가 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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