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건강증진연구소 <서리풀 논평 - 세월호의 비극, 이제…무엇을 할 것인가>

[라포르시안]  이 시간까지도 100명 넘는 목숨이 차디찬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하여 이성으로 무엇인가를 가리고 따지며 준비하는 것은 채 준비되지 않았다. 그저 황망하고 미안하다. 그리고 분하다.

 지난 주 우리는 차마 서리풀 논평을 낼 수 없었다. 그 무엇이든 차분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어떤 말로도 참담한 현실을 대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한 주가 지났지만 사정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충격과 상처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그리고 비현실적 거리감과 뒤섞인 기시감(데자뷔).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용돌이 속에서도 ‘힘’은 멈추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 참극을 만들어낸 바로 그 힘. 얼굴만 달리해서 위로를 말하고 대책을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추스르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또 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되게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억지로라도 약간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참혹한 이 사고는 벌써부터 정치의 장에 들어와 있다. 먼저, 지난해에 정부 어떤 부처가 만들었다는 황당한 위기관리 매뉴얼의 내용이 자꾸 되살아난다. “충격 상쇄용 기사 아이템을 개발하라”. 큰 사고가 났을 때 언론에 대응하는 방식을 정해 놓은 지침이다. 

사람들은 ‘꼼수’라 하지만 아마 ‘그들’은 달리 볼 것이다. 노출되는 바람에 탈이 났지만. 지금 정부의 관심도 사람들의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 아닐까. 사람들이 받을 사고의 충격 그 자체를 걱정해서 그럴 리 없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신자유주의 국가는 경제적 책임 모두를 시장에 내주었다. 대신 비경제적 취약성과 불확실성, 더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데서 스스로의 역할을 자임한다(미국의 911과 테러와의 전쟁을 기억할 것). 

사람이 원인이 되는 재난이야말로 그나마 남은 민낯을 드러낸다. 유일하게 남은 국가의 역할과 책임을 근본부터 흔들기 때문이다. 2005년 카트리나에 잘못 대처해 큰 정치적 타격을 받은 부시 행정부를 보라. 그래서 충격을 관리한다는 것은 곧 재난으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떼어내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일요일 오전에 벌어진 일은 또 어떤가. 그동안 아무런 역할을 못한 총리는 모든 책임을 지고 그만 두겠다고 했다. 무엇에 책임을 지는지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 도무지 알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공허하더라도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양’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총리의 사임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무수한 책임 묻기와 단죄가 기다린다. 부도덕의 극치를 보인 선원, 탐욕스러운 회사, 무능력과 부도덕을 공유하는 얽히고설킨 조직과 단체들. 그 가운데에서도 압권은 공무원과 관료 조직, 행정이다. 

모든 단계에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 어떤 환경과 제도, 구조를 말해도 개인은 그냥 수동적인 구조의 산물이 아니다. 가장 나쁜 조건 속에서도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마땅히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역시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국 이 모든 일을 꿰는 것, 그리고 앞으로 드러날 백가쟁명의 소리들은 ‘책임’을 둘러싼 투쟁이자 정치가 될 것이다. 책임은 잘잘못을 가리는 잣대이자 문제를 보는 우리 사회의 개념과 시각을 결정하는 패러다임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좁혀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가와 정부의 책임 문제가 핵심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개인과 조직의 책임은 무겁고 중요하다. 무엇을 핑계로 삼든 결코 면제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다.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데에 구체적인 개인과 조직의 책임은 막중하다. 

그러나 책임은 순서 없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출발은 핵심적 조건으로서의 국가와 정부로 돌아간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책임은 국가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국가로부터 ‘발현된’ 것이다. 

책임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은 두 개의 연결되지만 또한 분리된 국면을 갖는다. 하나는 사고의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는 이를 바탕으로 책임을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선 국가와 정부가 제대로 책임을 져야 한다. 망각에 저항하면서 집요하게 책임을 묻자. 그러나 이 책임은 정부에 속하는 공무원, 해경의 실무자, 장관과 총리라는 자연인이 져야 할 것을 넘는다. 사회적 규범과 가치, 주체들의 행동 원리를 규율하는 환경이자 조건으로서의 국가 책임이 더 무겁다 (물론 이는 정치와 행정을 통해 현실화된다). 

이 책임은 구조적이고 정치적이며 그래서 이미 우리의 일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지적해야 하겠다. 오늘 문제로 삼는 실패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국가의 근본 특성과 한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런 국가와 사회의 조직 원리 – 더 보태지 않아도 익숙한 것들 – 를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적 이익과 효율성이 이번 사건의 모든 단계, 모든 개인에게 (크든 작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비도덕적 행동들도 바로 그 효율성 논리로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엉터리 안전수칙이나 장치, 작동하지 않는 재난대비체계조차 마찬가지다. 비용과 효과로만 보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고, 심지어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몇십 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사고를 대비해서 막대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을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꺼렸을 것이다. 

개인으로 보면 이런 국가와 사회를 온존시키고 강화하는 데에 관여한 모든 당사자가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시침을 떼면서 애도에 동참하는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잘못을 고백해야 할 사람이 적지 않다. 정치와 행정은 물론이고, 특히 지식과 담론, 문화를 만드는 데에 앞장서온 조직과 개인도 모두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책임을 묻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책임의 구조를 다시 짜는 것이다. 비슷한 참극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 과제가 과거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또 다시 행정적, 실무적 책임으로 환원시키는 한 시스템은 또 다시 실패할 것이다. 

걸리는 것은 이번 일에서 국가와 정부는 거의 완전한 실패를 보았다는 점이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이런 국가와 정부에 다시 역할을 기대하고 책임을 지우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 그리고 가능할까. 

우선 명토를 박아 둘 일이 있다. 국가와 정부 실패가 명백하게 드러났지만 시장이 해결책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구조와 인양을 민간회사에 의존하는 이 정부의 한심한 상황을 보면서도 말이다. 

자연적이든 사람이 만든 것이든 마찬가지다. 재난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국가 권력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도, 항로를 추적하는 일도, 재난에 해경과 해군을 동원하는 것도 국가 권력만 할 수 있다. 국가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래된 국가로 돌아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이대로는 도저히 희망의 씨앗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더 나은 행정 관료와 지휘체계, 더 좋은 매뉴얼, 더 촘촘한 감독과 처벌로 또 다른 사고를 예방하기 어렵다.

 국가 권력에 기대야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구조로는 불가능한 이 곤혹스러운 딜레마.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방법은 국가와 정부의 변형 – 바탕부터 탈바꿈하는 것 – 이 아니면 안 된다. 

앞서 언급한 바우만의 어법을 빌리자. 경제는 포기하고 비경제적 취약성과 불확실성에 처한 개인을 보호한다고 하지만(안전), 그것을 다시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의 운명이다. 

오늘도 보고 있지 않은가. 사고를 낸 선박회사와 이들과 계약한 민간 구조업체, 그리고 국가 권력의 삼각동맹, 그리고 국가 권력 자체의 시장화. 신자유주의 국가의 딜레마와 이 운명을 넘어서야 새로운 시스템이 가능하다.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간단치 않은 질문이자 도전이다. 마침 힐러리 웨인라이트의 <국가를 되찾자>가 번역되어 나왔다(김현우 옮김, 이매진 펴냄). 차원과 범위는 다르지만, 지금 현실과 연결되는 몇 가지 출발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시장) 그리고 사회적 권력(시민사회)의 상호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에서 국가와 정부의 책임과 역할을 재조직화하는 원리로 좁혀 이렇게 요약하고자 한다. 좀 더 민주화된 국가 권력 또는 사회 권력이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국가 권력(그리고 행정).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치 경제의 목표는 정부의 등에서 민중들을 내리게 하는 것”이지만, 이제 “정부의 등에 다시 올라타는 새로운 방식들을 창조하고,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국가 공무원에 관한 좀 더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짐으로써, 더욱 중요한 의미에서 국가에 바로 짓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정책과 행정, 그리고 관리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아무리 발본색원을 강조하고 혁명적 변화를 약속해도 마찬가지다. 

참여와 민주주의가 중심에 서는 변화된 국가 권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장은 국가 권력과 행정조직을 좀 더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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