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정신의학자, 자기 고백서이자 양심선언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펴내

"정신의학은 미국 의료계 비대함·낭비를 보여주는 한 예일 뿐"

[라포르시안 김상기 기자]  지난해 5월,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정신질환 분류와 진단기준을 대폭 수정한 ‘DSM(정신질환 진단-통계편람 )-5’를 발표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DSM-5가 시행에 들어가면 정신질환 진단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이로 인해 정상인을 정신질환자로 둔갑시키는 문제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였다. 

DSM-5는 수줍음을 타거나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찾아오는 건망증과 아이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작적 짜증,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것조차 의학적 문제로 보고 약물로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지나치게 폭넓은 정신질환의 진단기준 때문에 이 개정안이 항우울제 등을 판매하는 거대 제약업계의 이익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도 보냈다.

최근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책이 발간됐다. 제목은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한 정신 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이다.

이 책의 저자는 듀크 대학교 정신의학부 학부장인 앨런 프랜시스(Allen Frances) 교수다.

그는 미국정신의학회(APA)에서 연례 모임을 조직하는 위원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DSM 3판(DSM-III) 및 3판 개정판(DSM-IIIR) 작업에 참여한 후 4판(DSM-IV)을 작성하는 팀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프랜시스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정신 장애가 범람하고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 이면에 감춰진 현대 정신병 산업의 어두운 단면을 건드린다. 

1980년대 이후 DSM이 수차례 개정 작업을 거치면서 일시적이고 일상적인 심리증상이 정신질환의 범위에 편입된 결과, 정신 장애의 과잉 진단과 의약품 과잉 처방, 주기적인 정신병의 유행이 초래됐음을 지적한다.

특히 지난해 5월 개정된 DSM-5 출시를 기점으로 정신 의학계와 제약업계의 공감대 속에서 지금까지의 과잉 진단이 겉잡을 수 없는 초과잉 진단으로 들어설 것을 우려해 진단 기준의 변경과 함께 새로운 정신 장애가 발견되고 때로는 발명되는 현장을 낱낱이 공개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현대 정신의학계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일종의 내부 고발서이자 양심선언인 셈이다.

프랜시스 교수에 따르면 1980년 주의력 결핍 장애와 자폐증, 소아 양극성 장애가, 1994년에 아스퍼거 증후군과 성인 양극성 장애가 DSM에 새로운 정신 질환으로 등장하자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정상에서 정신 이상으로 진단을 받고 발병률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는 "결국 이 질병들은 전 세계에서 유행하는 '오늘의 진단'이 되었고, 제약사는 그전까지 창고에서 잠만 자고 있던 정신 자극제나 항우울제 등 향정신성 의약품들을 대거 발굴하고 새로운 특허를 통해 수많은 값비싼 처방약들을 시중에 쏟아내고 쓸데없는 처방과 투약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DSM-4 개정판의 과오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그는 "우리가 진단 과열 현상을 다스리려고 애썼는데도 DSM-4는 진단 거품을 더욱 부풀리는데 오용됐다"며 "우리는 지루할 만큼 소박한 목표를 잡았고, 강박적일 만큼 철두철미한 기업을 사용했고 엄격할 만큼 보수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는데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세가지 거짓된 정신장애가 유행하는 현상을 예측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그것은 자폐증, 주의력 결핍 장애, 소아 양극성 장애였다"고 이 책에서 말했다.  

과잉 진단을 부추기는 느스한 정신질환 진단기준이 제약산업과의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s)과 무관치 않다는 의심을 드러냈다.

책에 따르면 2011년 미국의 항정신병 치료제 매출은 180억달러에 달했고, 이 중에서 항우울제는 110억달러, 주의력 결핍 장애치료제가 80억달러 가까이 달했다.

1988년에서 2008년 사이에 항우울제 사용은 거의 4배 가까이 늘었고, 이러한 의약품의 처방전 가운데 80%가 1차 진료의사에 의해 작성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5월 개정된 DSM-5는 폭식 장애나 아이들의 발작적 짜증, 노화로 인한 건망증, 저장 장애, 행동 중독 등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상적이기까지 한 증상들마저 정신질환의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지금 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각한 진단 초인플레이션과 유행병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했다.

다른 의료 분야와 달리 정신의학에는 아직 정신장애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생물학적 검사 기법이나 정신장애의 원인과 그 치료법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진단 과잉이 특히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뇌과학과 신경생리학 등이 꾸준한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은 정신장애와 관련해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에만 의존하고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질병으로 진단하고 있는 탓에 현대 정신의학이 체크리스트 의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교수는 "인간 정신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모든 차이를 약으로 간편하게 치료해야 마땅한 화학적 불균형으로 둔갑시키는 야심 찬 정신 의학계와 제약회사의 마케팅 술책에 굴하지 않고 우리들 대부분은 충분히 정상임을, 단지 질병은 평균에서 먼 극단에만 숨어 있을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정신의학은 미국 의료계 전반의 특징인 비대함과 낭비를 보여주는 한 예일 뿐이다. 상업적인 이해가 이미 의료계를 장악해 환자보다 수익을 앞세우며 과잉 진단, 과잉 검사, 과잉 치료의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며 "미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보건 분야에 두 배나 돈을 쓰는데도 그 성과로 보여줄 만한 것은 시시하다.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학을 비롯한 의학 전체를 다듬고 구조를 재현하고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DSM 개정 시기                                    주 요 내 용
1952년 DSM-I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정신 상태와 장애를 진단할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정신 의학 협회(APA)가 세계 보건 기구(WHO)의 ICD-6(국제 질병 및 사인 분류 6판)DMF 기초로 출간. 100여 개의 정신 장애를 수록한 130쪽짜리 작은 책자.
1968년 DSM-IIDSM-I에서 크게 변하지 않음.
1980년 DMS-III진단 간 위계를 설정하고 보다 세분화시켜 200여 개의 정신 장애를 수록, 500쪽에 이르는 대형 책자로 출간. DSM이 정신 의학의 바이블, 문화적인 아이콘, 항구적인 베스트셀러로 성장하는 계기가 됨. 경계성 성격 장애, 사회 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자폐증, 주의력 결핍 장애, 양극성 장애 등이 포함됨.
1987년 DSM-IIIR
1994년 DSM-IVDSM-III에서 소극적 변경으로 수록된 전체 정신 장애의 수는 거의 변화 없음. 아스퍼거 증후군, 성인 양극성 장애 등이 포함됨.
2000년 DSM-IV-TR
2013년 DSM-5

DSM-III, DSM-IV처럼 개정판을 로마 숫자로 표기하던 것을 환경 변화에 발맞추어 보다 신속하게 지속적으로 개정, 소수점 단위로까지 표시할 수 있도록 아라비아 숫자인 5로 표기. 진단 체계와 진단 기준의 대폭적인 개정과 삶의 일부이자 일반 인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증상 여럿을 정신 장애로 등재함으로써 출간 이후 정신 의학계 안팎에서 논쟁의 대상이 됨. 소아에서의 발작적 짜증을 “파탄적 기분 조절 곤란 장애”로, 노화로 인한 건망증을 “약한 신경 인지 장애”로 규정하였으며, 폭식 장애와 성인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저장 장애, 월경 전 불쾌감 장애, 행동 중독 등이 포함됨. 사별로 인한 애도 또한 “중증 우울증”으로 진단받을 수 있도록 예외 조항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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