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한약재 벤조피렌 허용기준 강화" 발표해 놓고 안 지켜…당시 담당자 "오래된 일이라 기억 안나"

관련 제정고시도 이미 효력 상실 상태인 듯

[라포르시안 김상기 기자]  지난 2009년 12월 식품의약품안전청(현 식품의약품안전처)은 "한약재 제조 과정 중에 발생하는 벤조피렌 저감화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식약청은 공식 보도자를 통해 "한약재를 60℃ 이하에서 건조할 경우 벤조피렌이 검출되지 않거나, 저감화 되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한약재의 안전한 제조기준을 만들어 한약규격품 제조회사를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이와 함께 수입 한약재에 대한 검사를 강화 하는 등 한약재에 대한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식약청이 이런 계획을 추진한 배경은 지난 2008년부터 2009년 초까지 실시한 '한약재 중 벤조피렌함유량 모니터링연구' 용역연구사업의 결과 때문이다.

이 연구사업은 국내 유통되는 한약재를 대상으로 벤조피렌 함유량을 검사한 것으로, 한약재 14개 품목 26개 시료에서 벤조피렌 기준치가 설정돼 있는 '숙지황'과 '지황'의 기준치인 5ppb 이하보다 높게 검출됐기 때문이다.

벤조피렌은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인체발암물질로 지정한 물질로, 그 당시 한약재 중에서 숙지황과 지황에만 '5ppb 이하'라는 기준이 설정돼 있었다.

이런 문제가 확인됨에 따라 시기약청은 한약재의 안전한 제조기준을 만드는 차원에서 광물성 생약을 제외한 모든 한약재에 대해 벤조피렌 허용 기준을 5ppb 이하로 규정하는 관련 고시를 행정예고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확인됐다. 식약청이 행정예고를 통해 밝힌 한약재의 벤조피렌 허용 기준 강화 고시가 실시되지 않은 것이다.

전국의사총연합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전의총은 26일 "식약처에 이 고시가 시행된 이후 한약제의 벤조피렌 함유량 조사결과를 요청하는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식약처의 답변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며 "2009년 12월 3일에 행정예고한 고시에는 분명 모든 한약제 대상으로 벤조피렌 기준을 5ppb 이하로 설정한다는 것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전 고시에서처럼 숙지황과 지항에 대해서만 기준이 있었다"고 밝혔다.

식약처가 공식 발표와 다르게 국민들을 속였다고 것이다.

전의총은 "당시 식약처가 발표한 보도자료는 주요 언론을 통해 널리 전파됐다"며 "이를 본 국민들은 당연히 한약재가 이전보다 더욱 안전할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데 대부분의 한약재에 대해 벤조피렌 함유량이 조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국민들의 한약재에 대한 불신은 더욱 증폭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생약 벤조피렌 허용기준 강화' 고시 미궁으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실제로 본지가 식약처의 관련 고시 등을 살펴본 결과 전의총이 주장한 내용이 사실이었다.

앞서 식약처는 지난 2009년 4월 '생약의 벤조피렌 기준 및 시험방법'을 제정 고시한 바 있다.

이 고시는 지황과 숙지황에 대한 벤조피렌 허용기준을 5μg/kg으로 한다는 내용이다.

▲ '생약의 벤조피렌 기준 및 시험방법' 고시 부칙

주목할 점은 이 고시의 부칙 내용이다. 부칙에 따르면 '이 고시는 2011년 4월 12일까지 효력을 가진다. 「행규제기본법」제8조제3항에 따른 심사요청을 거쳐 제1항에 따른 유효기간이 연장되지 아니하거나 이 고시가 2011년 4월 12일까지 개정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이 고시는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식약처 홈페이지에서 2011년 4월 12일 이후 '생약의 벤조피렌 기준 및 시험방법' 개정고시를 확인할 수 없는걸로 볼 때 이 고시는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식약처는 2010년 10월 29일 '생약 등의 잔류오염물질 기준 및 시험방법' 고시를 개정하면서 ▲생약의 벤조피렌 기준 및 시험방법 항목을 신설했다.

신설된 항목의 내용은 '지황과 숙지황의 벤조피렌 허용기준을 5μg/kg 이하'로 한다는 것으로, 기존의 '생약의 벤조피렌 기준 및 시험방법' 고시와 동일했다.

그런데 이 신설 항목도 '2013년 10월 29일까지' 재검토기한이 설정돼 있었다.

재검토기한이란 '훈령․예규 등의 발령 및 관리에 관한 규정'에 따라 이 고시 발령후의 법령이나 현실여건의 변화 등을 검토해 해당 고시의 폐지, 개정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기한을 설정해 놓은 것이다.

즉, 지항과 숙지황에 대한 벤조피렌 허용기준치 설정 규정을 2013년 10월 29일까지 유지한 후 폐지나 개정 등을 검토하겠다는 의미다.

▲ '생약 등의 잔류오염물질 기준 및 시험방법' 고시 중 일부

식약처는 다시 2011년 6월 24일자로 '생약 등의 잔류·오염물질 기준 및 시험방법'을 일부개정고시하면서 재검토기한을 2014년 12월 31일까지로 재설정했다.

올 연말까지 지항과 숙지황에 대한 벤조피렌 허용기준치 설정 규정을 적용한 후 다시 폐지나 개정 등을 검토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앞서 2009년 12월 식약처가 발표한 '광물성 생약을 제외한 모든 한약재에 대해 벤조피렌 허용 기준을 5ppb 이하로' 강화하겠다는 것과 다른 내용이며, 지황과 숙지황에 대해서도 관리기준을 지속적으로 적용하겠다는 게 아니라 한시적으로만 적용하겠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어찌된 영문일지 알 수가 없다.

본지가 식약처 관련부서에 문의했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식약처 한약정책과 관계자는 "현재 이 사안에 대해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현재로서는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난 2009년 12월 당시 보도자료를 배포했을 때 담당자는 관련 내용을 알고 있을까.

당시 담당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9년 12월 식약처가 배포한 보도자료에 담당자로 기재된 한약정책과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그 이후에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정확한 사안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지만 식약처 관계자들로부터 속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이와 관련 전의총은 "수많은 한약재에서 인체에 유해한 벤조피렌이 검출된 후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모든 한약재로 조사대상을 확대하겠다고 공언한 후 이를 이행하지 않은 식약처를 강력하게 규탄한다"며 "어떤 이유로 2009년 12월 3일 행정예고 했던 고시가 입안되지 않았는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알리지 않았는지 등을 소상하게 밝혀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작년엔 천연물신약서 벤조피렌 등 검출돼 논란한편 지난해 4월에는 천연물신약에서 포름알데히드와 벤조피렌 등의 발암물질이 검출돼 논란이 된 바 있다.

식약처는 지난해 4월 건강보험에 등재된 천연물신약 6종을 수거 검사한 결과, 6종 전부에서 발암물질인 벤조피렌 또는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식약처의 검사 결과에 따르면 6품목의 천연물신약 중 1품목을 제외한 5품목에서 포름알데히드 1.8~15.3ppm(㎎/㎏, 100만분의 1)이 검출됐고, 6품목 중 5품목에서 벤조피렌 0.2~16.1ppb(㎍/㎏, 10억분의 1)이 검출됐다.

6품목 중 4품목은 벤조피렌과 포름알데히드 모두가 검출됐다.

당시 식약처는 “포름알데히드는 생체 내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돼 존재하는 물질로 사과(17ppm)나 배(60ppm) 등에도 존재하며 검출된 양이 극미량인 것으로 볼 때 원료 한약재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벤조피렌의 경우도 대상 제품의 제조공정 중 고온 가열하는 과정이 없는 것을 고려할 때 원료 한약재를 불에 쬐어 건조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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