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심장이 있는 병원에 관한 이야기 '신의 호텔'

의료행위 본질에 충실한 '느린 의학'이 주는 진정한 효율성 보여줘

[라포르시안 김상기 기자]  지난 10일 하루 동안 의사들의 파업, 엄밀히 말해 집단 휴진이 있었다. 정부가 추진하는 원격진료와 의료영리화 정책에 반발해 집단적인 휴진 투쟁에 나선 것이다.

그날 하루 의사 파업에는 전국 각 수련병원에서 근무하는 전공의 수천명이 참여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에 있는 젊은 의사들의 파업은 의료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이날 파업에 참여한 한 전공의는 “나중에 개원했을 때 환자들을 상대로 박리다매할 수밖에 없는 의사로 전락하기 싫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공의는 “의학교과서에서 체중 당 2g의 항생제를 쓰라고 가르치는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1g 이상 사용하면 나머지 사용량을 환자에게 부담시킨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의학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의료현실을 개탄했다.

그 전공의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의사들 생각이 그렇다. 의과대학에서 배운 의학교과서에 따른 적정 진료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건강보험 재정 절감에만 초점이 맞춰진 급여기준과 낮은 의료수가는 의사로서 당연히 갖는 그런 생각을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혈압 환자를 치료하면서 '해리슨'보다 급여기준이 먼저다.

그러다보니 의술을 하는 의료전문가가 아니라 의료행위로써 먹고사는 자영업자란 인식이 강하게 형성됐다. 환자를 진료할 때 최선의 진료보다는 건강보험 급여기준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따진다. 의료업을 하는 자영업자로 생존을 위해서. 

낮은 수가 탓에 동네의원에서는 하루 평균 50~60명의 환자를 진료해야 경영이 가능하다. 환자의 병력을 꼼꼼히 청취하고, 문진을 하고 필요하면 검사를 하는 당연한 진단 과정을 시간에 쫓기듯 단 몇 분만에 압축적으로 끝낸다. '1시간 대기 5분 진료'의 박리다매식 진료행태는 한국적 의료환경에서 등장한 필연적 결과다. 

의료에 있어서 경제성과 효율성이 곧 선(善)이고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더 빠르게, 더 많이, 그리고 더 저렴하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끊임없이 내몰린다.

이렇게 왜곡된 의료환경이 전공의들로 하여금 의사로서 정체성과 자존심에 상처를 안겼고, 환자를 두고 파업에 나서게 만들었다. 그나마 이번 파업을 통해 많은 걸 바꾸지도 못했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여기, 아주 이상한 병원이 하나 있다. 이해하기 힘들 만큼 비효율적인 구조에 진료시스템은 또 너무 느리다. 변변한 첨단 의료장비도 없이 의료진은 오로지 환자들 곁에서 끊임없이 살피고 대화를 나눈다.

수간호사들이 하루 종일 환자들 곁을 지키고, 의사들은 늘 환자의 침상 옆에서 오랜 시간 살펴보고 얘기를 한다. 디지털병원 시대에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지만 이 병원의 의사들은 환자들을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최근 발간된 '신의 호텔'(와이즈베리 출판사)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지역 공공병원 '라구나 혼다(laguna Honda, 깊은 호수라는 뜻)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병원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아픈 이들을 무료로 돌보던‘파리시립병원’을 모델로 세워진 빈민구호소이자 주립병원이다. <위치 정보 보기>

이곳을 찾는 환자들은 노숙자, 극빈자 등 사회소외계층을 비롯해 알코올중독자, 치매와 뇌졸중을 앓는 노인 등 까다로운 만성질환자가 대부분이다. 이 책의 저자 빅토리아 스위트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UCSF) 의대 부교수이자 역사학자다. '신의 호텔'은 스위트 교수가 라구나 혼다 병원에서 20여년 간 보고 듣고 느낀 걸 담아냈다.

당초 스위트 교수는 딱 두 달간만 이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구나 혼다가 지향하는 인간 중심적 진료, 충분한 시간을 들여 환자의 몸과 마음과 환경을 모두 돌보는 ‘느린 의학’에 매료돼 20여 년간 근무하게 됐다고 한다.

▲ 라구나 혼다 병원.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라구나 혼다 병원 의료진의 헌신적인 의료행위에 관한 게 아니다. 현대의학과 보건의료체계가 간과하고 있는 의학과 병원의 본질적 기능에 관한 이야기다. 환자와 의사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친밀한 관계(라포르(rapport)와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의료행위의 본질에 충실한 '느린 의학'이 얼마나 효율적일 수 있는가를 이야기 한다.

스위트 교수가 책에서 소개한 78살의 노인환자(뮬러 부인) 이야기가 그렇다. 그 환자는 라구나 혼다로 오기 전 다른 병원에서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고 엄청난 통증과 함께 정신착란, 당뇨병 진단까지 받았다. 당연히 그에겐 향정신성 약물과 함께 인슐린을 투여하는 처방이 내려졌다.

어찌된 일인지 그 노인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됐다. 그런 상태에서 라구나 혼다 병원으로 옮겨졌다. 스위트 교수는 이 환자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고 필요한 검사를 했다. 이상하게 당뇨 증상도 없었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수술을 받은 고관절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티타늄 고관절이 관절와(關節窩)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그런 상태였다고 판단했다. 당연히 통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스위트 교수는 그 환자를 수술한 병원 의사에게 연락해 재수술을 받게 했다. 재수술을 받고 다시 라구나 혼다 병원으로 돌아온 환자에게 스위트 교수는 조금씩, 아주 느리게 재활치료와 함께 향정신성 약물과 인슐린 투약량을 줄여나가는 조치를 취했다. 6개월 후 그 환자는 제발로 걸어서 퇴원을 했다. 물론 다른 약물 투여도 더는 필요없게 됐다.

라구나 혼다 병원에서 이 환자에게 취한 의학적 조치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였다. 약물 투여를 줄이고 검사를 줄였다. 그 대신  많은 시간을 들여 의사가 환자를 살펴보고 그때그때 필요한 최소한의 의학적 조치만 취했다. 지속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조금만 이상이 있으면 곧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환자를, 병상회전율을 높여 수익성을 높여야 유지되는 병원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라구나 혼다 병원에도 효율성과 경제성의 압박이 가해졌다. 주정부에서 효율성 제고와 비용절감을 위한 조치에 나선 것이다. 디앤티 병원효율성제고 컨설턴트라는 회사가 어느 날 이 병원에 점령군처럼 들이닥쳤다. 그리고 몇 개월의 경영 진단 끝에 수간호사 등 관리인력 감축 등의 효율성 제고 방안을 제시했다. 

이를 근거로 병원은 시간당 생산효율 준수, 과학적 경영관리와 첨단시설 설립 등 21세기 보건의료기준으로 봤을 때 바람직한 변화로 내몰렸다. 경제학자와 컨설팅 전문가, 보건의료 행정관료의 눈으로 들여다 본 라구나 혼다는 오로지 비효율투성이다. 수간호사 수는 다른 병원에 비해 곱절로 많고, 개방병동은 환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보고체계는 허술하며, 단기 치료 및 단기 퇴원환자가 드물어 생산성은 떨어지는 '문제적 병원'에 불과했다.

당연히 컨설팅 보고서는 라구나 혼다가 추구해온 '느린 의학'을 선이 아니라 악으로 보고, 효율성을 앞세워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의 전환8을 요구했다. 인력을 줄이고, 업무에 다른 생산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다. 의료진의 수는 줄고, 컴퓨터를 이용한 문서작성 같은 행정업무에 매달리면서 환자의 곁에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스위트 교수는 이런 변화를 거치는 동안 의료진은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환자들은 더 빈번히 안전사고에 노출되고 치유는 더뎌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책에서 라구나 혼다 병원의 '느린 의학'이 오히려 의료비용 절감에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된 고관절 환자의 경우처럼.

"뮬러 부인의 경우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환자를 여유 있게 계속 재평가한 덕분에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신체검사를 해보고 구식 에스레이를 촬영해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시간이 든다. 사실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도 거의 두 시간 정도 전체적으로 꼼꼼하게 검사를 하고, 매일매일 짧은 시간이나마 서두르지 앟고 환자를 찾아간 덕분에 뮬러 부인이 정신이상도 아니고 정신병도 없도, 당뇨병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의료가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MRI보다도 자렴하고 일상적으로 시행하는 임상검사보다도 저렴하다. 뮬러 부인은 남은 한평생 병원에서 돌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에서 빼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를 직접 계산해보았다. 라구나 혼다의 환자들에게 1인당 매년 12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 들고 평균 6년을 머무른다고 치면 뮬러 부인을 정확히 진단한 덕분에 보건의료계는 대략 40만 달러의 돈을 아낀 셈이다"(본문 154P.)

주요 의료장비라곤 엑스레이뿐인 라구나 혼다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은 바로 ‘시간’이다. 그 시간이 라구나 혼다 병원을 '신의 호텔'로 불리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2년여에 걸쳐 이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은 30대 마약중독자의 이야기가 그걸 증명한다.  '급성 횡단성 척수염'으로 라구나 혼다에 입원한 이 환자는 입원과 퇴원을 수십번 반복하며 마약으로 자신의 몸을 망쳤다. 마지막으로 이 병원을 찾았을 때 그에게 생긴 욕창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했다. 욕창은 등 가운데서 시작해서 꼬리뼈까지 내려와 있었고, 척축를 덮고 있었야 할 지방층고근육도 사라져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스위트 교수는 2년이란 시간을 들여 그를 끈질기게 치료했다. 그 과정이 끝났을 때 그는 50대 같은 외모에서 다시 30대 중반의 여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원내 사회복지사가 찾아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그녀를 치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근대이전의학은 이 특별한 요소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것을 '시간의 손길'이라고 불렀다. 근대이전의학은 적절한 조건 아래서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거의 모든 것이 치유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구나 혼다에서는 급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테리씨 같은 환자들은 행정가나 예산위원의 눈길을 피해 우리 신의 호텔 같은 곳에 숨겨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시간의 손길이 자신의 할 일을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본문 122p)물론, 우리도 그걸 잘 안다. 풍성한 시간이 갖는 치유의 힘을. 하지만 그런 '시간의 손길'을 갖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환자 한 명당 5분의 시간조차 버겁다. 더 많은 환자를, 더 신속하게 진료하기를 끊임없이 강요받는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공장시스템이나 마찬가지다. 대체 누가 이런 시스템을 원하는 걸까. 환자도 아니다. 의사도 아니다. 그럼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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