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 이종각 지음 / 서해문집 펴냄, 2013년

오래 전에 영국의 미술사학자 타이먼 스크리치교수가 쓴 <에도의 몸을 열다>를 [북소리]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에 네덜란드의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학, 특히 외과술이 전해진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이 견고한 전통의학의 아성을 뚫고 일본에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중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하여 다양한 유럽 문화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의학보다 우수한 서양의학이 수용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서양의학서들이 한자로 번역,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두술 이외에 서양의학이 중국에 뿌리를 내린 것 같지 않습니다. 역시 중국을 통하여 서양문명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 우리나라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란다라고 부르던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교류를 하고 있을 뿐이던 일본에서 서양의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론컨대 유일하게 통상이 허용된 네덜란드 배를 타고 온 능숙한 외과의사가 때마침 만난 환자에게 외과술을 베풀고 효험을 얻은 것을 지켜보던 일본통역이 그 기술을 익혀 외과를 시작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의 통역수준으로는 내과기술을 익히기란 쉽지 않았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병증에 대한 의학적 술기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따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로 네덜란드에서 감초를 원료로 가래를 삭이는 ‘즈보토’나 외뿔고래의 어금니를 가루로 만들어 식중독에 사용했던 ‘우니코루’가 수입되어 팔리면서 난의학이 외과영역에서만 통한다는 선입견이 바로 잡히게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스기타 겐파쿠 등이 번역하여 소개한 해부학책 <해체신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전통의학서에도 인체의 장부의 위치를 나타내는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중국의 최고(最古)의 의학서 <황제내경>에 실려 있는 추상적인 그림을 원전으로 하여 오래도록 이어져왔던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형수의 사체를 부검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기타 겐파쿠 등이 그런 부검자리에 입회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해체신서>를 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현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이종각 교수는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에서 ‘일본 최초로 서양 번역에 도전 인체해부서 <해체신서>를 펴내 일본 근대화를 열다’라는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이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해체신서>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체신서>의 출간으로 난학은 근대일본의 변화에 촉매역할을 하면서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는 토양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겐타쿠는 일본 근대의학의 개척자로 칭송되어 각급학교의 교과서에 등재되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고 합니다.

<해체신서>는 독일 의사 쿨무스의 《Anatomische Tabellen》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Ontleedkundige Tafelen》을 저본으로 스키타 겐파쿠(杉田玄白) 등을 중심으로 하여 중역한 의학서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스크리치교수는 중역이라고는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그림과 설(設)은 전부 해체에 관한 화란의 여러 책을 비교연구하여 가장 명료한 것을 채택하고 이를 베껴서 손쉽게 정통하게 한 것(타이먼 스크리치 지음, 에도의 몸을 열다, 169쪽)”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학계가 다수의 의학서를 종합할 수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어에 정통한 의사가 있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쿄 우에노역 근처에 있는 미나미센주역 건너편에 있는 에코인(回向院)이라는 조그만 절이 있는데, 도쿠가와 막부시절인 1651년에 문을 연 고쓰가하라(骨ヶ原)형장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1868년 폐지될 때까지 210년간 무려 20만 명 이상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스러져갔다는, 막부시대 에도(江戶)의 2대 형장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일본 근대의학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중요한 일이 일어난 것은 1771년 초봄의 일입니다. 이날 스기타 겐파쿠를 비롯하여 에도에서 근무하는 각 번의 시의(侍醫, 다이묘 등을 진료하는 의사)들이 인체 해부를 처음 참관하게 된 것인데, 이들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가 들고 온 네덜란드어 인체해부서 <타펠 아나토미아>에 실려 있는 폐, 간, 장,위 등의 모습과 위치가 중국 의서에서 설명한 위치와 형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이날 해부를 통하여 인체와 하나하나 대조하여 확인하였는데, 어느 하나 틀리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의사들이 인체해부에 공식적으로 참관하게 된 것은 이보다 17년 앞선 1754년의 일이고 당시 참관했던 막부의 관의 야마와키 도요는 참관결과를 기록하고 인체도를 그려 <장지(藏志)>라는 책으로 펴냈는데, 역시 중국의 오장육부설과 실제로 본 인체해부의 결과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의사들의 인체해부 참관이 이어졌지만, ‘중국인과 서양인의 인체구조가 다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만,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상(現狀)과 실재(實在)’를 구분하는 방법, 즉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물을 그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데서 머물지 않고 그 사물이 사실상 무엇인가를 풀어내기 위하여 사유하는데서 우리는 진일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겐파쿠는 분명 다른 의사들과는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체해부를 참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료타쿠와 같은 번에 소속된 번의 나카가와 준안에게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동의를 얻어낸 것입니다. 당시 료타쿠는 49세, 겐파쿠는 39세, 그리고 준안이 33세였다고 합니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실제로 본 인체 해부는 참으로 하나하나가 놀라움이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은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 이 <타펠 아나토미아>, 한 권만이라도 아무쪼록 새롭게 번역한다면 인체의 내외구조도 잘 알게 돼, 오늘날의 치료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50쪽)” 그런데 문제는 이들 가운데 평소 관심도 있었고 나가사키에 유학도 다녀온 료타쿠가 그나마 네덜란드어에 조금 눈을 뜨고 있었을 뿐, 겐파쿠나 준안은 아예 ABC도 모르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보아도 이들이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합류한 가쓰라가와 호슈까지 네 명은 료타쿠를 맹주로 하여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타펠 아나토미아>를 읽으면서 네덜란드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니 그 무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번역작업에 도움이 될 자료는 료타쿠가 틈틈이 만든 네덜란드어 단어장과 아오키가 지은 <화란문자약고>의 필사본 그리고 나가사키 유학 때 구입한 프랑스-네덜란드어 사전 <블란사서>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어의 의미를 모으고 문장을 이해하면서 번역을 조금씩 진행해나갔는데, 특히 료타쿠의 집념은 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료타쿠가 조사해서 추정한 단어나 문구에 대해 겐파쿠 등이 의견을 제시하여 결정하는 방식이었는데, 융통성 없는 료타쿠는 번역이 완료되어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곤 해서 어려움이 컸지만, 머리 회전이 빠르고 요령이 좋은 겐파쿠가 그와 같은 결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번역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겐타쿠는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막부의 양서에 대한 감시와 규제입니다. 8대 쇼군 요시무네가 서양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1720년 양서의 수입을 허용했지만 서양과 관련된 일본 내 출판물은 심한 제약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번역작업이 시작된 지 1년 반 정도 지나서 1차 번역이 완료할 수 있었는데, 역시 수완이 좋은 겐파쿠가 번역된 내용 가운데 해부도만 모아서 먼저 출간해보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본서에 대한 일종의 광고성 전단[당시에는 이런 광고성 전단을 히키후다(報帖)라고 했다고 합니다]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술 밖에 모르는 의사들이 갑자기 오란다 의학의 번역서가 출판되면 그 유용성을 판단하기에 앞서 이단으로 몰아 소동을 빚는 사태를 방지해보자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고심참담의 노력 끝에 이룩한 신성한 학문적 성과를 선전용 전단으로 사용하다는 겐타쿠의 제안이 료타쿠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네덜란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던 <홍모담>이 발매금지를 당하고 저자들이 처벌을 당했던 사례를 들어 납득을 시킨 겐타쿠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 설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타펠 아나토미아> 번역서의 제목을 정하는데 있어, 인체의 각 부분의 기능을 설명하고 해부도가 첨부된 의학서이므로 ‘해체(解體)’라는 용어가 원서의 내용에 부합된다고 해서 선택되었고, 일본에 새롭게 소개되는 학설이라는 의미로 ‘신서(新書)’라는 말을 붙이기로 정하였고, 선전용 책자의 이름은 해체약도(解體約圖)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해체약도>의 출간 이후 막부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한방의를 비롯한 세간에서도 부정적 반응은커녕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들은 <해체신서> 발간을 서두르고, 겐파쿠는 번역작업의 가장 큰 공로자인 료타쿠에게 <해체신서>의 앞머리를 장식할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지만, 서문은커녕 번역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고사했다고 합니다. 나가사키유학길에 들른 덴만쿠(天滿宮)에 참배하면서 ‘난학을 공부하여 얻은 지식을 이름을 알리는 미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신명(神明)에게 맹세한 것을 지키겠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변변치 않은 네덜란드어 실력으로 서둘러 진행한 번역한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출판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 즉 학자적 양심으로 부끄러워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한 것이고, 그 결과 겐타쿠가 받은 모든 영예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말았던 것이라고 하니 안타까우면서도 학자적 양심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겐타쿠는 번역작업에 참여한 호산의 아버지, 막부의 고위 의관인 호겐을 통하여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해체신서>를 헌상하는데 성공하여 막부의 동의를 등에 업으면서 한방의의 거센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다니,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지 알만 합니다.

<해체신서>가 발간된 이후 겐파쿠를 중심으로 난의학이 융성하게 되는데 겐파쿠는 난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을 담은 회고록을 집필해서 83세 되던 1815년 탈고하지만 따로 출판하지 않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본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겐파쿠의 회고록은 1869년에서야 후쿠자와 유키치(게이오대학의 창설자)의 눈에 띄어 <화란사시(和蘭事始)>라는 필사본의 제목을 <난학사시(蘭學事始)>로 바꾸어 목판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 책의 부록으로 덧붙여 있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말미에 <해체신서>가 발간될 무렵의 조선에서는 서양의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에서와 달리 서양의학을 일찍 수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시 막부가 대외정책을 비롯하여 중앙행정을 통제하고는 있다고는 보건행정은 번주가 다스리는 지방행정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반면 중국이나 조선은 강력한 중앙행정조직이 지방행정까지 결정하고 있었고, 보건의료정책 역시 중앙에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전통의학자들의 벽을 뚫고 전혀 새로운 체계를 가진 서양의학이 자리 잡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전통의학을 하시는 분들이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는 <동의보감>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도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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