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 알랭 드 보통과 존 암스트롱 지음 /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펴냄, 2013년

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알랭 드 보통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양기화의 북소리]를 통해서도 소개해드린 바 있는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통하여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중심으로 프루스트의 편지와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뽑아 올렸습니다. 그것도 아홉 가지나 말입니다. 예를 들면, 책을 읽는 방법을 제외하고서도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입니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다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같습니다.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보통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능통하다고 합니다. 스물세 살에 쓴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계기로 일상적인 주제를 철학적으로 풀어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철학의 대중화를 시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목록을 훑어보면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장소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행이면 여행(여행의 기술, 공항에서 일주일을), 건축이면 건축(행복의 건축), 인간의 불안한 심리(불안, 철학의 위안), 사랑과 섹스(사랑의 기초 한 남자, 인생학교 섹스, 너를 사랑한다는 것), 일(일의 기쁨과 슬픔) 등등.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은 예술을 이야기 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이렇게 늦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존 암스트롱과 이 주제를 두고 나눈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보통이 집필했다고 합니다. 우리말 제목은 <영혼의 미술관>이라고 옮겼습니다만, 원제는 'Art as Therapy' 입니다. ‘치유로서의 예술’ 정도로 직역을 한다면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을 주지만,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라는 부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담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 제목을 보면 미술관에 걸린 미술작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미술작품을 주로 인용하고 있지만, 때로는 건축물에서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하고 있어, 미술의 영역을 넘어 예술로 범위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화두를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거창한 질문으로 말입니다. 인류가 처음 남긴 역사의 기록은 문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들은 왜 그림을 남겼을까요? 단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낀 점을 남겨두고 싶어서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술을 위한 예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없을까요? 저자들은 신비한 영역으로 물러나려고 하는 예술의 지위에 강한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즉 “예술은 도구일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에 보다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5쪽)”고 주장합니다. 더하여 예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도구들처럼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예술은 우리의 어떤 타고난 약점들, 이 경우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심리적 결함이라 칭할 수 있는 약점들을 보완해준다.(5쪽)”고 단정하고,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체”라고 제언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매체로서의 예술의 기능을 ‘방법론’에서 논하고 이어서 사랑에 관련된 예술의 치유능력을 ‘사랑’에서, 자연을 마주할 때 알게 되는 심리적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예술의 기능을 ‘자연’에서, 자본주의 개혁의 길잡이로서의 예술의 역할을 ‘돈’에서, 그리고 ‘정치’에서는 정치목적으로 이용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먼저 치유 매체로서의 예술은 일곱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그리고 감상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출발점은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데 서툴다.(8쪽)”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억하는데 서툰 이유를 아십니까? 탈리 샤롯은 <설계된 망각>에서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즉 망각이라는 편리한 기능이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장바티스트 르노 ,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다부타데스, 1786년

문제는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문제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인데, “글쓰기는 분명 망각의 결과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고, 미술은 그다음으로 중요한 방편이다.(8쪽)”라는 보통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보통은 하자 많은 인간의 기억을 보완해주는 기능으로서의 미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하여 장바티스트 르노의 <미술의 기원: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다부타데스, 1786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이 햇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했을까 싶습니다.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림보다는 사진이 더 우수한 매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진찍기에 몰두하다 보면 그 장면에서 제대로의 느낌을 얻을 수 없어 기억에 새겨진 것이 별로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사진을 보더라도 별다른 감동이 이끌어내어지지 않게 될 것 입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장면에서 특히 눈길을 끈 포인트를 추출해서 그려내는 것이 그림입니다. 따라서 그림과 사진은 분명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림그리기를 추천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김한민 지음, 그림여행을 권함, 민음사, 2013년)

예술의 두 번째 기능 ‘희망’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예술이 가진 독특한 힘을 “만일 세상이 좀더 따듯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술적 경험이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그런 순간은 괴롭거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특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는 즉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작품과 마주칠 때 찾아온다.(16쪽)”라고 적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꼭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볼 때 눈물이 터지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눈물의 원인을 추적하는 한편, 역사를 되짚어 눈물이 마르게 된 다양한 계기를 찾아 정리한 제임스 엘킨스 교수는 <그림과 눈물>에서 사람들이 그저 ‘아름답다’는 등 애매한 이유로 울었다고 전했습니다만, 치유의 매체로서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조이한교수님의 경우를 보면 딱히나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조이한 지음, 그림 눈물을 닦다, 추수밭, 2012년)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인간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빠질 수 있는데, 예술이 균형을 회복시켜주고 열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의 미학적 취향이 다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저자는 “도덕적 메시지, 다시 말해 보다 나은 자아로 거듭나라는 메시지는 애초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예술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42쪽)”라는 주장에서 “이 항아리는 쓸모 있는 도구였다는 점 외에도,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라고 평가와 함께 조선왕조 시대의 백자 달항아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표면에 작은 흠이 흩어져 있고, 유약이 잘 발라지지 않아 표면이 얼룩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항아리를 겸손하다고 본 이유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남다른 시각과 표현방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보면, 학교수업 이외에도 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핵심을 잘 요약해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 역시 핵심요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제시한 일곱 가지의 키워드에 따라서 인간의 취약점을 잘 요약하고 그러한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예술의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도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2. 희망의 조달자,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4. 균형추,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등입니다. 또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기술적 해석, 정치적 해석, 역사적 해석, 충격가치적 해석, 그리고 치유적 해석 등이 있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치유적 해석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보통에게 있어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사랑을 잘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길도 모색해본 끝에, 예술의 사명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로 툭 튀어나오는 법이 없고, 연습을 하지 않으면 도움이 안되는 자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 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키워드를 역시 다양한 미술작품과 건축작품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보통은 긍정적 사고를 가진 철학자라고 하겠습니다. 니콜라 푸생의 <겨울(대홍수), 1660~1664년)>라는 작품에서 그는 “인생은 대개 이런 모습으로 흘러간다. 난파선에 매달리고, 아무것도 없는 바위일망정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순간의 안전을 구한다. 따라서 관계의 파탄, 그로 인한 상심은 상궤를 벗어난 일이 아니다.(119쪽)”라는 메시지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며,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미술관을 찾았을 때 명작을 모사하는 분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답을 얻었습니다. “처음에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개성과 상상력이라곤 없는 방식으로 그저 충실하게 영웅의 그림들을 모사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자신의 감탄을 비판적인 눈으로 분석할 줄 알게 되었다. (…) 터너는 존경하는 선배의 작품에서 그를 진정으로 흥분시켰던 측면을 연구할 줄 아는 현명함과, 그에 기초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킬 줄 아는  용기를 겸비하고 있었다.(188쪽)” 그렇습니다. 요즈음 케이블에서 선배가수의 노래를 얼마나 근사하게 카피하는가를 평가하는 오락프로그램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출연하시는 분들 가운데 가수를 꿈꾸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던데, 그들이 선배의 기교를 카피하는 재주에 만족하고 자신만의 노래 부르기를 게을리 한다면 오히려 재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마지막 화두는 정치미술입니다. 저자가 정치미술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 잘못 이용당할 수도 있지만, 선을 위한 정치미술의 잠재력은 이론 영역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현실 영역에서 활용법을 찾아야 할 것이며, 예술이 개인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사회를 치유하는 힘도 유용하게 쓰여야 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이 늘 아쉬운 저에게도 귀감이 될만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반복이 중요하다. 어떤 것의 정신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려면 그것을 꾸준히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없다. (…) 일년에 한두 번 미술관을 찾는 것으로는 예술이 약속하는 근원적인 충족을 얻기에 부족하다.(218쪽)”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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