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 편집국 부국장

[라포르시안] 혹자는 보건의료 분야는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한다고 말한다.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보건의료 영역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보건의료 분야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보장제도의 중요한 한 축인 보건의료제도와 인프라는 가장 비생산적이고 시장경쟁의 논리가 비켜 가는 곳이다. 보건의료 특성상 내재하고 있는 시장실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과 중재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당연히 정부의 개입 강도는 정치적 지향성과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는 보건의료 영역에 정치 권력이 개입해 만든 대표적인 산물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정권 때이다. 당시 군사정부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그럴듯한 사회보장제도 도입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정치적 이유로 도입된 의료보험제도는 직장의료보험을 시작으로 12년 만인 1989년 지역의료보험을 아우르는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로 확장됐다.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가 열리면서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보건의료 공약의 한 자리를 차지했고, 건강보험 적용 확대 방향은 어느 집단의 표심을 가져올 것인지를 가늠하는 정치적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인 '문재인 케어'를 비판했다. 보장성 강화가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민의 보험료 부담을 가중하고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감사원까지 앞세워 문케어를 공격하더니 이제는 필수의료 지원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보장성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지난 13일 열린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 건강을 지키는 최후 보루인 건강보험에 대한 정상화가 시급하다. 지난 5년간 보장성 강화에 20조원을 넘게 쏟아 부었지만, 정부가 의료 남용과 건강보험 무임승차를 방치하면서 대다수 국민에게 그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고 문케어를 겨냥해 작심 발언을 했다. 비급여의 급여화를 핵심으로 추진한 보장성 강화가 성과는 크지 않은 데 비해 급여비 과다지출로 건강보험 재정을 위태롭게 한다는 논리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로 인한 건보재정 건전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애써 외면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추진에 따른 국민의료비 절감 효과다. 문재인 케어 추진 이후 초음파와 MRI 등 각종 검사비와 고가 항암제 등에서 건강보험 적용이 확대됐다. 그만큼 국민의료비 절감 혜택도 커졌다는 의미다. 지난 국정감사 때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건강보험보장성 강화 대책 과제별 의료비 경감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7년 9월부터 올해 6월까지 보장성 확대에 따른 국민의료비 부담 경감 혜택이 총 4,477만명에게 21.3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년간 보장성 강화에 20조원을 투입한 결과 국민의료비 경감은 그보다 많은 21.3조원에 달했다.  <관련 기사: 문케어로 건보재정 건전성 위협?...국민의료비 경감 혜택이 더 컸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건보재정 지출을 효율화(?)해 아낀 건보재정을 필수의료 기반 확충에 사용한다는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및 필수의료 지원 대책안'이란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이미 급여화한 MRI·초음파 검사 급여기준을 더 까다롭게 하고, 급여화 예정이던 일부 의료행위 항목에 대해서는 건강보험 적용을 재검토하겠다는 내용이다. 의료 남용과 건강보험 무임승차를 막겠다며 의료이용량이 많은 가입자를 겨냥해 본인부담을 높이는 '외래의료이용량 기반 본인부담률 차등제'(가칭) 도입을 검토하고, 본인부담 상한제 기준을 높여 혜택을 받는 대상을 줄이는 대책도 제시했다.

건보재정을 갈아먹는 또 다른 요인으로 외국인 얌체 의료쇼핑을 지목했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외국인 피부양자 자격기준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지난 1월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얻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조치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런데 외국인 건강보험 재정수지를 보면 2021년에 5125억원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최근 5년 연속 흑자를 냈다. 외국인 가입자들이 자신이 낸 보험료보다 급여비 혜택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외국인 건강보험 가입자들은 실제로는 건보재정에 기여하고 있지만 억울하게 '먹튀, 무임승차'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셈이다. <관련 기사: 건강보험 재정에 기여하면서 '먹튀' 오명·역차별 당하는 외국인>  

제대로 따져 보자. 윤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건강보험 무임승차자는 누구인가. 과다 의료이용자? 아니면 외국인 가입자? 아니다. 건강보험 국고지원 책임을 다하지 않는 정부다.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건보료 예상수입액의 20%) 일몰시한이 이달 31일까지다. 하지만 국회에서 관련법 개정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법을 개정해 일몰제를 폐지하거나 유효기간을 연장하지 않으면 국고지원은 효력을 잃게 된다. 건강보험 국고지원이 종료될 경우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료를 매년 18% 이상 올려야 부족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국고지원이 사라지면 정부는 완전한 무임승차자가 된다. <관련 기사: 건보재정 정부지원 책임은 외면...보장성 후퇴·국민 부담만 늘리는 윤정부

보건의료 영역에서 시장실패에 대응하려면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공공의료를 확충하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건강보험 국고지원 확대나 공공의료 확충에는 손을 놓고 있다. 대신 보장성 축소와 환자 본인부담을 높여서 만든 재원으로 민간병원을 지원해 필수의료 지원 기반을 만들겠다고 하니 생뚱맞다.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임에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은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는 대통령의 말에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이쯤 되면 '건강보험 무임승차'를 시도하는 게 누군지,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을 엎으려고 하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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