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화 위한 관련 법안 또 발의...국가재정법 적용으로 국회가 통제
"기금화로 재정운용 투명성·보험 책임성 확립해야"
의료계·시민단체 등 반대 거세..."건보재정을 정부 쌈짓돈으로 만드는 것"

[라포르시안] 건강보험 재정 기금화를 위한 법안이 다시 발의되면서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재점화됐다.  

지난 17대 국회부터 건강보험 재정의 기금화를 위한 관련법 개정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임기만료로 모두 폐기된 바 있다. 20대 국회에서도 작년 10월 건강보험 기금화를 위한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과 ‘국가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됐으나 이후 입법 논의는 흐지부지 끝났다. 

현재 4대 사회보험 중에서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의 사회보험재정은 '기금관리기본법'에 따라 기금 운용계획안 및 결산에 관해 국회의 심의를 받도록 돼 있다. 다만 건강보험 재정은 국회의 통제 없이 보건복지부장관 승인 아래 운용된다.

이 때문에 국회를 중심으로 건강보험 재정의 회계 투명성과 운영의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금으로 전환해 정부의 예산회계절차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건강보험 기금화로 정부 예산회계절차를 따를 경우 복지부가 건보공단의 예산안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해 심의조정을 받은 후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해 심의·의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앞서 2018년에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2022년까지 건강보험재정을 기금화하는 법안을 제정하는 내용의 재정개혁 권고안을 마련한 바 있다. 

재정개혁특위가 권고한 기금화 방안에 따르면 1단계로 통합적 국가재정 규모의 파악을 위해 건강보험 등을 포함한 총지출 및 복지지출 규모 정보를 2019년부터 공개하고, 중장기 재정전망 등이 포함된 건강보험종합계획과 연도별 시행계획을 국회에 보고토록 한다.

2단계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을 추진하면서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 방안을 마련한 후 오는 2022년까지 기금화를 위한 법제화를 추진토록 권고했다.

최근에는 국민의힘 서정숙 의원이 지난 7일 국민건강보험을 국민연금처럼 기금화하는 국민건강보험법과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건강보험을 기금화해 국가재정법 적용을 받고 국회 심사를 거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서정숙 의원은 "건강보험은 사회보험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영되는 4대 사회보험 중 재정규모(지출기준)가 2021년 77.7조로 가장 크고 정부지원금(2021년 9.6조원)이 가장 많이 지급되고 있다"며 "건강보험을 기금화해 국가재정법의 적용 및 국회의 심사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재정운용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보험의 책임성을 확립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기금화를 놓고 찬성하는 쪽에서는 정부재정의 정확한 파악과 국민부담 적정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회 등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부의 재정활동의 흐름을 보여주는 통합재정수지에서 건강보험은 제외돼 정확한 정부재정을 파악하는 데에 제약이 되고 있다"며 "정부재정은 원칙적으로 공공부문 전체의 재정활동을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며, 건강보험은 향후 국민부담을 가중시키는 대표적인 정부사업으로 국민부담의 적정화를 위해 기금을 통한 정부재정의 틀 속에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 기금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건강보험 기금화를 논의하기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지금은 건강보험 재정 운영이 보험자와 공급자, 가입자단체 간 합의와 계약 방식에 의해서 수입과 지출 규모를 결정한다. 이런 건강보험 의사결정구조가 국회로 전환될 경우 정치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해 의료보험 수가계약에도 큰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있어서 보험료 지출액과 연동되는 국고지원 부담을 낮추기 위해 기재부가 보장성 확대에 지금보다 더 반대 혹은 소극적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가장 큰 문제는 기금화를 하더라도 급여비 지출 규모를 통제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고령화와 보장성 확대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지출 규모가 지속해 커지고 있으며, 코로나19 유행과 같은 돌발적인 상황을 맞았을 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기금화로 국가재정법 적용 및 국회 심사를 거칠 경우 한시가 급한 의료현장 상황에 따른 탄력적인 대응마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건강보험 운영 주체인 복지부와 건보공단은 물론 의료계와 시민단체에서도 기금화 반대 의견이 높다. '단기보험'으로 운영되는 건강보험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발상이라고 지적한다.

복지부와 건보공단은 기금화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건강보험 재정이 수입과 지출을 1년 단위로 맞추는 단기보험이란 점에서 기금화가 맞지 않고, 규제 강화로 재정 운용의 융통성과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건강보험재정 기금화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회 심의를 받게 되면 국민건강 보장이란 건강보험 본래 목적 달성보다 보험재정 안정화와 지출 억제에만 우선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의료계는 "건강보험재정을 기금으로 관리하면 국회는 물론 예산 관련부처의 통제 강화로 자금 운용의 융통성과 유연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보장성 확대나 적정보상 이전에 재정증가 억제에 자금 운영의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시민사회도 기금화에 강력 반대하고 있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14일 성명을 내고 "‘건강보험 지출 효율화’에 더해 건강보험 재정 자체를 정부(기재부)가 통제하면서 수십조 원을 입맛에 맞게 운용하고 싶을 것"이라며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건강보험과는 맞지 않게 '수익을 최대로 증대'시킨다는 명분으로 건강보험 재정으로 '유가 증권', '수익 증권'을 매입해 기업과 금융 시장에 자금을 수혈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고 금융 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건강보험 재정이 각종 증권에 투자되면 천문학적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무상의료운동본부는 "건강보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정부의 지원을 대폭 늘리고, 한시 지원 조항을 폐지해 항구적 정부 지원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촉구해 왔다"며 "그러나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건강보험 재정을 어떻게 하면 정부 쌈짓돈으로 만들 것인가에만 골몰해 있다. 건강보험 기금화 법안이 이를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운동본부는 "국민건강보험 기금화는 정부 지원 삭감과 폐지, 보험료 인상, 보장성 축소를 가져온다"며 "국민의힘은 건강보험 기금화 법안 즉시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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