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읽기 / 박성창 등 지음 / 민음사 펴냄, 2013년

지난 해 여름, 홍대 앞에 있는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열린 북콘서트 참석이 시작이었습니다. 이날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이 함께 진행한 북콘서트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를 다루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듯 하면서도 생각나는 대목이 별로 없어 북콘서트에 가기 전에 새로 읽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새롭게 깨닫는 점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진행하신 분들의 전공을 살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바탕으로 1989년에 만든 영화 <프라하의 봄>의 한 장면을 소개하기도 하고 쿤데라의 작품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낭독하기도 하면서, 무대는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들로 끊임없이 채워졌습니다. 덕분에 책을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부분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 읽기는 민음사의 전작출판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번 번역출판 기획에는 희곡 <열쇠의 주인들>과 에세이집 <저 아래에서부터 당신은 장미 향기를 맡을 것이다>를 넣지 말아달라는 요구가 있어 빠지게 되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그의 전작을 다 읽은 것은 아닙니다.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어떤 작가의 작품세계를 모두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경험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을 모두 읽은 것과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헤밍웨이전집을 통독한 기억 정도입니다.

쿤데라의 작품을 읽은 분들은 대뜸 그의 작품들은 너무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작품 말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제나 작품해설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책읽는 이가 온전히 혼자서만 느껴야 만하는 것도 크게 한 몫을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쿤데라 전작출판을 기획한 방미경님은 “쿤데라 처럼 본인의 작품에 해설이 실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잘못된 설명이나 사견이 개입되어 자신의 소설이 곡해되는 것을 싫어하기 작가(박성창 외 지음, 밀란 쿤데라 읽기, 192쪽)”라면 상대하는 것이 참 무섭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밀란 쿤데라 읽기>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해 오신 이난아 교수께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들을 분석한 글을 담은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을 읽고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저의 경험에서 본다면 말씀입니다.

<밀란 쿤데라 읽기>는 크게 작가에 대한 글과 그의 작품에 대한 글로 나뉘어 있습니다. 김연경, 정여울, 정혜윤, 김미래 님들이 쿤데라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을 쓰셨고, 두 편의 대담을 기록한 글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담의 하나는 예술의 구성에 대한 살몽과 쿤데라의 대담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박성창 교수와 쿤데라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번 전작시리즈의 번역을 맡아주셨던 분들께서 쓰셨다는데, 꼭 한 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정체성>을 번역하신 이재룡교수님을 대신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크베토슬라프 흐바틱의 글을 박진곤님의 번역으로, <정체성>은 김병욱님께서 쓰신 글을 싣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기획한 밀란 쿤데라 전집은 <농담>에서 <향수>까지 열권의 장편과 단편집에 이어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소설작품들을 분석한 김영경 교수께서 지적한대로, 쿤데라의 전집으로 나온 책들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라는 작가소개말이 전부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김영경 교수는 “아무리 문학 작품의 독자성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인색한, 심지어 무례한 소개가 아닐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저 두 줄에 소설가 쿤데라의 정체성이 압축된 셈(32쪽)”이라고 정리하셨습니다.

프랑수와 리카르는 쿤데라의 창작도정을 세 개의 사이클로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 <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 <웃음과 망각의 책(197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종래의 국가적 틀에서 벗어나 국제적 독자를 겨냥하여 작품을 쓴 시기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4)>,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그가 애용해온 7부 구성 형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직접 프랑스어로 글을 쓴 시기다. 중간 사이클이 끝난 시기, 즉 <불멸> 이후 일정 시기가 그의 문학적 위기의 시기로 언급되곤 한다.(164쪽)” 작품들이 작가의 삶의 여정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본다면 그의 작품의 방향은 그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쿤데라의 삶을 보면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만 했구나 싶습니다. 학업에 정진할 무렵에는 <농담>을 통해서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반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것이 첫 번째 겪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입당과 탈당을 반복하였고,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려는 순간 소련군의 침공으로 다시 위축되고 말았으며, 결국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하는 그야말로 보헤미아적 운명에 몸을 맡겨야만 했으니, 그의 삶은 언제나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특히 프랑스로 이주한 초기에는 마치 비탈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안고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이다! 눈길을 아래쪽으로 급전직하 하고 손은 위를 향하여 내뻗는 비탈. 여기서 마음은 자신의 이중의 의지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 눈길은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올라가고 내 손은 심연을 붙든 채 그 위에 몸을 지탱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것이 나의 비탈이며 나의 위험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53쪽, 민음사, 2004년)”

살몽과의 대담에서 그의 작품의 뼈대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책을 읽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부분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쇤베르크의 ‘음표들의 시리즈’와 유사하게 몇몇 기본 단어에 기초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는 망각, 웃음, 천사, ‘리토스트’, 경계선 같은 주된 다섯 단어들이 줄곧 분석되고 연구되어 정의되면서 마침내 실존의 범주로 변환된다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집 한 채가 몇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것처럼 이와 같은 몇 개의 범주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건축학적 구상’이라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작품이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수학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 역시 <밀란 쿤데라 읽기>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체코의 한 비평가가 ‘<농담>의 기하학’이라는 글을 통하여 분석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쿤데라는 “저는 소설을 부로 나누고, 부를 장으로 나누고, 장을 다시 단락으로 나누는 것, 다시 말해 소설의 분할을 명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일곱 부는 각기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입니다. 각각의 것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서술 유형에 따라 특징지어지죠. (…) 또한 각기 고유한 길이가 있지요.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66쪽)”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특성을 베토벤의 사중주곡 과 비교해보이기도 합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음악적 재능이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던 키치에 대한 궁금증도 풀렸습니다. 쿤데라는 이 부분을 ‘건축학적 균형의 비밀’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스토리 차원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에세이(키치에 대한 에세이) 차원에서 쓰인 것이라는 겁니다. 인물들의 단편적인 삶들은 하나의 ‘예(例)’, ‘분석되어야 할 상황’으로 이 에세이 속에 삽입된 것(57쪽)”이라고 말입니다.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의 성격에 대하여 김영경교수는 다음처럼 정리하였습니다. “대체로 그의 소설 관련 에세이는 르네상스와 18세기(세르반테스, 라블레, 스턴), 19세기-근대(발자크, 플로베르, 톨스토이, 도스토엡스키), 끝으로 그의 스승-선배격 거장들(프루스트, 카프카, 무질, 브로흐)을 아우르며 어지간한 소설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정치하다. 이른바 쿤데라 사전이 정의하는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다. 인간 존재의 네 영역 혹은 요구(‘유희’, ‘꿈’, ‘사고’, ‘시간’)을 담아내는 장르이기도 하다.(34쪽)” 그의 에세이에 담긴 이런 힘은 어쩌면 학부에서 공부한 미학의 내공이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일단 그가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을 일독이라도 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성창 교수는 쿤데라와 대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향수>를 대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향수>에서는 프라하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향수>에서는 <농담>과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주제가 되었던 기억과 망각을 다루게 된 동기를 물었습니다. 쿤데라는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의 능력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기억 능력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 아닐까, 기억은 망각의 한 형태는 아닐까 하는 점을 짚어보려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박 교수는 프루스트의 시도와의 차이점을 다시 물었고,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기억을 통해 되찾은 삶의 행복과 희열을 노래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 속에 떠올리는 것은 생생한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환영(illusion)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이번 소설에서 조제프라는 인물을 통해 주로 이러한 부재, 실재의 환영, 그리고 이러한 ‘환’의 ‘멸’, 즉 환멸(dés-illusion)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86쪽)”

프루스트는 오감의 촉발에 의하여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무자의적 기억은 자의적 기억과는 달리 진실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즉 과자냄새, 수저가 접시에 부딪혀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자동차의 휘발유 냄새 등을 통해 촉발되는 무자의적인 기억이 등장인물들을 저 멀리 과거로 이끌어가는 안내자가 되고, 등장인물들은 과거에 대한 의식에서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조각의 삶의 체험은 오랜 시간의 망각 속에서 숙성되어 그로부터 무자의적인 기억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져 변화된 상태로 기억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작의적인 기억은 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조경식, 망각의 담론, 기능 그리고 역사; 최문규 등 지음, 기억과 망각, 274쪽, 책세상, 2003년)

정혜윤 PD는 “쿤데라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비합리적인 면, 감상적인 면, 나의 취약한 면, 나의 안일한 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과도 같다. 그는 시시한 것은 시시하다고 알려 주고 하찮은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너무나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든지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44쪽)”라고 적었습니다.

아무리 처음 가보는 곳이라도 상세한 지도와 안내서가 있으면 문제없이 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밀란 쿤데라 읽기>는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안내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책을 먼저 읽고 작품해설을 읽는 편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 해설을 먼저 읽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출발해서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을 읽은 다음에 <농담>에서 <향수>까지 소설들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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