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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라는 왜 의료기술 보급될수록 ‘빈곤 늪’에 빠지나의료접근성 / 로라 J. 프로스트, 마이클 R. 라이히 / 서울대학교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 옮김 / 후마니타스

“새로운 항바이러스제가 보급되면서, 미국에서 1996~97년 연령 보정 AIDS 사망률이 48퍼센트 감소되었고, 서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사망률이 낮아졌다. 그러나 HIV에 감염된 전 세계 인구의 95퍼센트가 빈곤 국가에 살며, 그들 대부분이 비용 장벽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상의 문제나 제도적 문제 탓에 생명을 연장할 치료법에 접근할 수 없었다.”

왜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가에는 HIV 항바이러스제처럼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이 전달되지 못하는 걸까.

단순히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일까. 아무리 좋은 의료기술이나 의약품이 존재하더라도 빈곤 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구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최근 하버드 보건대학원 국제보건학과의 다케미 프로그램((Takemi Program) 책임교수인 마이클 R. 라이히와 Global Health Insights 공동창립자 로라 J. 프로스트가 쓴 '의료접근성' 한국어판 번역서가 나왔다. 

'의료접근성'은 지난해 8월 출범한 서울대학교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에서 역자로 참여했다. 이 책은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는 데 필요한 좋은 의료기술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란 물음에서 시작한다.

저자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B형간염 백신, 체내 삽입형 피임 기구인 노르플란트, 말라리아 신속진단검사 등 6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개발도상국 국민들에게 의료기술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점을 꼼꼼하게 따지고 분석했다. 가난한 국가에서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원인으로 '빈곤'을 꼽았다. 저자들은 “의료접근성의 결정적인 장애 요인은 비용 문제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의약품이나 다른 보건의료기술을 구매할 돈이 부족하다”며 “그들은 값비싼 신약, 새로운 기구와 진단법 등을 이용할수록 더 깊은 빈곤의 늪에 빠진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자원이 부족하며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빈곤 국가의 정부는 공공기관에 보건의료 신기술을 도입하기가 어렵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는 가난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원인이기도 하다”고 했다.

빈곤층의 질병이 가난의 결과이자 원인인 것처럼 빈곤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란 관점이다.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백신 보급이 대표적인 사례다.

1980년대 초 다국적 제약사인 머크가 세계 최초의 B형간염 백신인 ‘헵타박스’를 개발해 출시했다. 머크가 이 백신을 처음 미국 시장에 출시했을 때 접종 비용은 1회분당 30달러 이상이었다. 게다가 면역력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접종 횟수가 3회였다.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 예방접종에서는 소아마비, 디피티, 홍역, BCG 등의 백신을 합쳐 소아 한 명당 1달러 미만으로 조달했다. 1회 접종에 30달러 가까운 비용이 소요되는 B형간염 백신은 필수 예방접종에 포함될 수 없었다.

비용 부담 문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개발도상국가에서 B형간염 백신을 필수예방접종에서 배제토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선진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백신 수요가 적었고, 관련 제약사는 백신의 생산량을 늘리지 않았다. 이는 백신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1999년 WHO를 비롯해 유니세프, 세계은행, 게이츠재단, 록펠러재단, 국제제약협회연맹 등이 모여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이 창립되면서 이런 문제가 해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GAVI가 설립되면서 제한된 가용성, 가격 적정성, 채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직적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GAVI 기금과 국가간 수요예측을 통해 개발도상국가에 B형간염 백신을 조달하는 데 재정을 지원함으로써, GAVI는 B형간염 백의 국제시장이 분명히 존대한다는 사실을 백신 제조 업체들이 인식할 수 있게 했다”

▲ 이미지 출처 : 국경없는의사회

의약품 가격만 낮춰지면 가난한 국가에서 의료접근성 문제가 저절로 해소될까. 안타깝게도 빈곤 국가에서 의료접근성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1990년대 프라지콴텔(주혈흡충증 치료약)의 특허권이 끝난 이후 더 많은 공급자들이 세계 시장에 진입해 제품 가격이 내려갔으나 접근성은 여전히 향상되지 않았다는 걸 지목했다. 왜 그런 걸까.

아프리카 국가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취약한 공공보건의료체계, 건강에 대한 정치적 책임성의 부재, 공공 및 민간의료시설의 부패, 국제무역 및 특허 분쟁, 질병과 치료에 대한 문화적 차이, 생산품을 분배·처방·전달하는 데서 발생하는 어려움 등이 의료접근성 향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짐바브웨의 여성들이 여성용 콘돔에 달린 고리를 장식품인 팔찌로 만들어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HIV 진단법은 그 제품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낙인 효과를 유발함으로써 최종 사용자에게 제대로 보급되지 못했다. 좋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그 기술이 애초 의도대로 쓰이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저자들은 “가격과 특허권에만 해결 방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의료 현장에서 직면하는 구체적인 문제점은 주목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며 “상품이 개발된 이후 최종 사용자에게 의약품이 전달되기까지 매 단계마다 다양한 취약점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사례들을 종합해서 살펴본 결과, 이 책은 가난한 국가들의 의료접근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몇 가지 교훈을 던져준다.

그 중에서 '안전하고 효과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지만 그것이 기술의 접근성과 건강 증진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는 교훈에 방점을 찍고 싶다.  좋은 의료기술이 최종 사용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접근성 과정의 조직적 구조, 가용성, 가격 책정성, 채택의 각 과정을 면밀하게 파악해 끊임없이 촉진하고 적극적으로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김상기 기자  bus19@rappor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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