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석(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혁신산업위원회 부위원장)

[라포르시안] 기원전 4세기 고대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는 고르디우스 전차가 있었다. 그 전차에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매듭’이 있었는데,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그 매듭을 풀 수 있다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이 매듭을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아무도 풀 수 없었다.

어쩌면 ‘신의료기술평가’는 국내 의료기기산업계의 풀리지 않는 매듭인 듯하다. 수년에 걸쳐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만 아무도 그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총 1,800건의 신의료기술평가가 신청됐다. 이 가운데 신의료기술로 승인된 건수는 753건(41.83%)이며 나머지는 ▲조기시술(347건·19.28%) ▲연구단계기술(197건·10.94%) ▲기존기술(503건·19.28%)로 분류됐다.

왜 이렇게 많은 신의료기술평가가 이뤄졌을까?

일반적으로 신의료기술평가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대상·목적·방법이 기존기술과는 다른 것으로 평가돼야한다. 신청자는 신의료기술평가를 통해 새로운 행위가 신설되고 치료재료나 의료장비를 동반한 행위 수가가 적절하게 보상받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기존기술과 유사할 경우에도 신의료기술을 신청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유는 개선된 의료기술에 대해 적절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은 신의료기술평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신의료기술은 주로 의료기기를 동반한다. 신의료기술에 사용된 의료기기는 스텐트와 같은 인체에 영구적으로 삽입되는 치료재료부터 암을 치료하기 위한 방사선 치료 장비까지 수많은 장비를 포함한다. 치료재료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운영하는 가치평가제도를 통해 개선된 제품에 대해 적정한 보상이 이뤄지는 기전이 있다. 반면에 의료 행위와 직접 연계된 장비의 경우에는 가치평가제도를 신청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많은 의료기기업체들이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신의료기술평가 통과를 희망한다. 물론 심평원의 행위결정 조정신청을 거쳐 행위 수가가 조정되기도 하지만 이는 개선된 기술을 보상하는 기전이 아니며 수가 보상에 있어서도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행위와 동반된 치료재료가 개별 수가로 보상이 안 되면 사용되지 못하는 것처럼 기능이 개선된 의료장비일지라도 적절한 행위 수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임상현장에서 환영받기 어렵다.

최근 뇌졸중 환자 보행재활로봇이 선별급여로 등재됐다. 보행재활로봇은 2009년부터 수년에 걸쳐 3차례나 신의료기술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존기술로 분류됐다. 이후 2019년도에 행위조정 신청을 했고 다시 의료기술 재평가 과정을 거쳐 최근에야 비로써 선별급여로 등재됐다.

신의료기술을 신청한 많은 의료기술이 기존기술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행위수가를 받기 위한 기전이 없다보니 계속해서 신의료기술 신청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로 보행재활로봇을 개발한 코스닥 상장사도 개선된 장비와 수가를 인정받기 위해서 10년이 넘는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물며 작은 국내 벤처회사가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수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개선된 의료기술의 가치를 적절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보다 명확하고 객관화된 기전이 필요하다.

모두가 신의료기술을 신청할 필요는 없다. 치료재료의 가치평가제도와 마찬가지로 개선된 의료장비의 수가를 판단하기 위한 객관적이고 예측가능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다면 말이다. 세상에 없던 획기적인 제품이 하루아침에 나오기란 쉽지 않다. 작은 기능 개선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제품이 등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더 우수한 제품 개발이 가능하다.

특히 기능 개선이 있다면 그 노력을 인정해야만 보다 나은 제품이 나올 수 있다. 혁신에 대한 보상도 중요하지만 혁신을 위한 사다리를 어떻게 연결해 주는지도 중요하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명확하고 분명한 제도적 사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의료기술 발전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제도는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혁신으로 가기 위한 과정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혁신일지 모른다. 고르디우스 전차의 매듭을 푼 사람은 알렉산드로 대왕이었다. 알렉산드로 대왕은 매듭을 보고 바로 칼로 잘라버렸다. 복잡한 문제에서는 대담한 방법이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의료기술평가 매듭을 풀 수 있는 답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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