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료 / 박재영 / 청년의사 펴냄, 2013년

출장길 파리에서 짬을 내 찾은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비롯해서 유명하다는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특별히 사람의 두개골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을 모아둔 전시실에서 오래 머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 않은 탓에 생소한 화가의 작품 분위기로 보아 해부학과 관련된 그림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에서야 최경화님의 <스페인 미술관 산책>에서 “서양회화에서 해골이 등장하는 경우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너희도 곧 죽어서 이 해골처럼 될 테니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직업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개 눈에는 X만 보인다’는 옛말이 틀림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직업의식을 끄집어 낸 것은 보건의료전문지 <청년의사>의 박재영 편집주간이 최근에 낸 <개념의료>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목도 그렇지만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라는 부제가 주는 느낌 때문에, 혹시 제가 모르는 병원 시스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의료 현실에 대한 생생한 문제의식이 페이지마다 피어올라 독자들을 감전시키는 책’이라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송호근교수님의 한줄 요약을 읽고서,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의료현장의 문제가 광범위할 뿐 아니라 심층적이기까지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최근 들어 ‘만성질환 관리제도’를 비롯하여 ‘포괄수가제도’, ‘선택진료제도’ 등등 보건복지부가 내놓는 정책마다 마찰을 빚는 의료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않은 현실에서 정부와 의료계의 간격을 좁히는 좋은 묘안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어 아주 적절한 시기에 나온 책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의료계나 정책담당자 모두에게 약이 될 만한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했는지 서론에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이 책의 독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의료와 관련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공직자들, 보건의료와 관련된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특히 동료 선후배 의사들과 의대생들, ‘보건’ 혹은 ‘의료’가 들어가는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는 전공자들과 학자들, 보건의료 분야를 담당하는 법조인들이나 언론인들 등이 그 대상이다.(13쪽)” 저도 그 대상이 된다고 보면 <개념의료>를 이 코너에서 소개하는 이유 역시 저자의 바람에 크게 공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415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에 담은 의료계의 문제들이 어느 하나 소홀하게 다룰 것들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읽는 분들에게는 송구한 노릇입니다만 저자께서 머리말에서 요약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한국의료의 오늘을 들여다보았다.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고유의 사회·문화적 특성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한국의료의 현주소는 밝음과 어두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 곪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을 지적했고, 의료비 지불제도의 개편을 비롯한 몇 가지 주요 현안들을 분석했다. 의료개혁이 왜 어려운 지,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지도 기술했다.

2부에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료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는지를 기술했다. 한국의료의 독특한 장점과 단점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비롯됐다. 의료대란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했는지, 왜 그렇게 격렬한 양상으로 나타났는지도 이 과정에서 ‘저절로’ 설명될 것이다.

3부에서는 보건의료의 패러다임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미래의 보건의료가 어떻게 달라질지, 우리는 어떤 대비를 해야 할지를 기술했다. 점점 더 질 관리가 중요해지는 이유, 과학기술이 바꿔놓을 의학의 미래, 의료분쟁의 새로운 해결 방식, 한정된 자원의 합리적 분배 등 지금보다 미래에 훨씬 더 중요해질 주제들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했다.(12쪽)”

책을 읽은 소감을 먼저 정리하면, 한국의료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그 근원에 이르기까지 파헤치고 해결방안의 도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자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보건의료 분야의 언론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삶을 오롯이 녹여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의료에 대한 저자의 번뜩이는 감각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자는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한국의료의 현재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의학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의료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는 문화적 배경이 많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의학자 혹은 의료인들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백년이 넘는 우리나라의 현대의학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의료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기대여명으로부터 국민의 건강수준을 나타내는 각종의 지표들이 선진국 수준을 뛰어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성장을 이룩하는데 투입된 비용은 매우 적게 들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비용을 적게 들이고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는 매력적인 면이라 할 수 있겠지만, 비용이 적게 든 만큼 본인부담률이 높고 보장성이 낮은 점은 그늘에 해당하는 어두운 면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료비의 본인부담률이 높은 것은 의료에 소요되는 재원 가운데 공공에 의하여 조달되는 비중이 낮은 것이 주요 원인이며, 건강보험이 중증질환보다 경증질환에 대한 보장에 치중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가에 못 미치는 건강보험수가구조도 빠트리지 않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병원들은 부대사업을 통하여 얻는 수익으로 수지균형을 맞추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국민들의 불만을 “국민들은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파동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성된 국민들의 의료불신 분위기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의료인들은 방어진료를 강화할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굿닥터>에서도 영리병원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영리병원의 개념을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다루어서 시청자들은 영리병원이 무조건 나쁜 체제라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보단체에서는 정부가 의료민영화를 추진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공공 의료기관의 비중이 낮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보면 의료는 오래 전부터 민영 의료기관이 담당해오고 있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공 의료기관처럼 영리를 외면하는 민영 의료기관이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영리병원의 문제가 아니라 영리법인 병원의 문제라고 좁혀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법인이 설립한 의료기관은 비영리기관으로서 발생한 수익을 전액 의료업에 재투자해야 한다고 현행 의료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을 풀어서 투자이익을 챙기는 주식회사 형태의 의료기관이 가능하게 하는 ‘영리법인 병원’제도의 도입을 검토해 온 것입니다. 저자는 영리법인 병원제도의 도입을 두고 찬방양론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두어야 할 점들을 짚고서, “요양기관 당연지정제가 유지되고 국민건강보험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유지될 경우, 영리법인 병원의 설립이 허용되더라도 그 자체로는 우리 의료 시스템에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3쪽)”고 진단하였습니다.

저자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내세운 ‘4대 중증질환 100%보장과 소득수준별 본인부담 상한제’와, 문재인 후보가 내세운 ‘본인부담 100만원 상한제’와 ‘비급여 항목의 대폭적인 급여화’라는 보건의료분야의 핵심공약이 “모두 ‘환상’에 가까웠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재원마련이 분명하지 않다면 이들 정책은 국민이 낸 돈보다 더 많은 혜택을 국가가 국민에게 돌려줄 것이라는 착각을 유도하는 선심성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의료정책이 정치적 이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의사들이 변화에 둔감한 것과 더불어 의료개혁이 쉽지 않은 이유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적 배경을 잘 살펴야 하는 법입니다. 1부에서 저자가 살펴본 한국의료가 처한 상황들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2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을 ‘기특하고도 안타까운 한국의료의 발전과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모양새입니다만, 읽고 나면 저자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부에서는 건강보험이 출범하게 된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1977년 7월 1일 지금의 건강보험의 전신인 의료보험이 출범하게 된 배경에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경쟁논리와 막 분출되기 시작한 근로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는 박정희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면 된다’는 개발논리를 앞세우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결국 ‘가능한 사람들부터 우선 시작하고, 차차 가입률을 끌어올리면 되겠다!’는 돌파구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도의 정착에 30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였지만, 불과 12년 만인 1989년 7월 1일 도시지역 의료보험이 시행되면서 전국민 의료보험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근 의약품 리베이트 근절이 화두가 되면서 적지 않은 의사들이 처벌을 받게 되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 건의 두 가지 핵심배경이라 할 의료보험의 도입과 정착과 함께 2000년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의약분업파동을 살피고 있는 것 역시 시의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전공이 의약품 사용과는 무관한데다가 의약분업이 시작되어 사회적 파장이 예고되던 2000년 7월 1일에는 일신상의 문제까지 겹쳐 당시 상황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2005년 대한의사협회에서 근무하면서야 제대로 된 배경과 사태의 진전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의약분업제도는 당시 국민의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개혁’의 대표적 타깃으로 지목된 의료계를 대상으로 한 ‘의료개혁을 위한 출발점’으로 ‘선택’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의약분업 자체가 중요했다기보다는 의약분업의 실시라는 커다란 변화를 지렛대로 삼아서, 해묵은 보건의료 분야의 수많은 불합리와 부조리를 한꺼번에 해소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던 것(210쪽)”이라고 합니다.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처럼 의약분업 역시 당연히 해야 하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져 왔던 것일 뿐이고, 그걸 실시한다고 해서 국민건강 측면에서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의약분업제도를 재평가하자는 의료계의 오랜 요구에 대하여 의약분업제도는 도입 명분이나 도입에 따른 성과가 분명하다는 정부당국의 설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3부는 앞으로 한국의료가 맞닥뜨리게 될 미래의 모습과 나아가 더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하여 위리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할 점들을 다루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의사들은 아주 보수적인 집단으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직업이 갖는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즉 검증을 거쳐서 확인된 시술만을 환자에게 제공해야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위해로부터 환자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반응도 늦기 마련입니다. 의료는 문화라고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개별 국가의 의료문화에 따라서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작금의 글로벌 변화를 보면 의료의 기본 패러다임이 달라질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의료서비스의 변화된 모습을 따라가려면 결국은 정부의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정부의 보건의료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바꾸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하여 “개념 있는 의사들이 많아져야 하고, 개념 있는 시민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런 국민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개념 있는 의료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415쪽)”고 저자는 마무리하였습니다. 보건의료정책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선입관을 가지기 마련입니다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기사를 쓰는 훈련이 되어 있는 언론계에 오래 몸담아온 저자의 맛깔나는 글솜씨로 한국의료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양기화는?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병리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신경병리학을 공부해 밑천을 삼았는데, 팔자가 드센 탓인지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을지의과대학 병리학 교수, 식약청 독성연구부장,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지금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상근평가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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