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주(의료기기규제연구회 총무이사)

[라포르시안] 헬스케어산업 종사자들에게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s·제조 및 품질관리기준)·GCP(Good Clinical Practice·임상시험관리기준)·GLP(Good Laboratory Practices·연구관리기준)·GDP(Good Distribution Practices·우수공급망관리)는 익숙한 국제기준들이다.

그런데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발간한 ‘WHO Expert Committee on Specifications for Pharmaceutical Preparations: fifty-fifth report’에서는 조금은 낯선 GRP(Good Regulatory Practices)·GRelP(Good Reliance Practices)가 언급됐다.

특히 부록 10번 ‘의료제품’ 규제에서는 GRelP(Good Reliance Practices)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의료제품은 의료기기·체외진단의료기기·의약품을 망라한다.

Good Reliance Practices를 요약하면 국가별 규제 당국이 상호 인정을 통해 신뢰를 쌓는 것으로 ▲보편성(universality) ▲의사 결정의 주권(sovereignty of decision-making) ▲투명성(transparency) ▲국가 및 지역 법적 근거에 대한 존중(respect of national·regional legal basis) ▲일관성(consistency) ▲능력(competency) 등 6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6가지 기본원칙에서는 ‘국가별 규제시스템 특성을 존중하면서 상호 인정이 가능한 부분에 있어 중복되는 자원을 절약해 더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생소한 내용인 만큼 이해를 돕고자 싱가포르와 태국 간 의료기기·체외진단의료기기 Good Reliance Practices 파일럿 프로그램 사례를 살펴보자.

싱가포르 HSA와 태국 FDA는 파일럿 프로젝트에 앞서 신뢰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왔다.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만들어 태국 FDA 심사자가 싱가포르 HSA에서 업무를 배우고, 업무 흐름이나 관련 문서 양식들도 함께 개발했다. 양국 의료기기업체 역시 싱가포르와 태국 규제 당국을 연결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해당 파일럿 프로젝트에서 핵심 내용은 양국 규제 당국의 동의 절차를 거쳐 평가 보고서를 공유한 부분이다. 이때 먼저 승인 받은 국가의 평가 보고서를 참조하고 해당국에서 평가를 진행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승인에 소요되는 시간을 대폭 단축했으며, 당국 간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의료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시장은 글로벌화 돼가고 있으며, 각국 규제기관들도 제품 안전·품질·성능 보장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 저개발국·선진국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양질의 치료를 받을 기회와 권리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상황에서 국내 긴급사용 승인을 거쳐 진단검사장비나 백신이 신속히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성숙한 규제시스템을 갖추지 못해 긴급사용 승인 검토만 1년 넘게 소요되는 국가의 국민들은 어땠을까?

한국은 선진적인 의료기기 규제시스템과 규제기관을 갖춘 국가로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허가 받은 의료기기는 아세안(ASEAN) 국가에서 참고 자료로도 활용된다. 국내 제조사뿐 아니라 수입사 역시 한국에서 허가·인증·신고한 제품을 영문으로 증명서를 발급받아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승인받는데 활용하고 있다.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국제의료기기규제당국자포럼(International Medical Device Regulator Forum·IMDRF) 가입국으로서 국제무대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아·태지역에서 더 큰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 의료기기 규제시스템을 통해 Good Reliance Practices를 실현한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그날이 오기를 나는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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