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주(의료기기규제연구회 총무이사)

[라포르시안] 국제의료기기 명명법에 의하면 의료기기 품목은 약 2만 개가 넘는다. 미국은 4천여 개에 달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2천개가 넘는다. 이 같은 다양성과 반대로 의료기기 유통은 오히려 단순해 의료기기법 시행 이후 큰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분야로 알려져 있다.

의료기기산업은 제조업(수입업) ‘허가’와 판매업 ‘신고’ 체계로 양분화 돼있다. 최근 제도 개선으로 업허가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가 판매업도 겸해야 하는 사례는 없어졌지만 허가와 신고 두 가지로 구분되는 체계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업허가는 법적 관리체계가 지정돼 전주기적 품질관리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며 역시 계속되는 안전성 관리 차원에서 UDI와 유통내역 보고의무가 추가돼 앞으로 갈수록 관리체계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비해 판매업은 자유롭게 신고제로 운영되고 있고 업허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리체계를 유지하고 있어 누구나 신고만으로 의료기기를 판매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 입장에서는 온라인이나 병의원 주변에서 판매업자를 통한 의료기기 접근성을 보장받고 있다. 이러한 낮은 접근성이 갖는 장점과 달리 단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최근 의료기기업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간납사와 제약에서 문제를 일으킨 CSO(판촉영업대행사)와 같이 편법을 통한 판매상이 생겼을 경우 제재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경우다.

기본적으로 간납사는 외국의 GPO(Group Purchasing Organization·구매대행사)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회사가 일정 구매력을 기반으로 병원과 협약을 맺고 묶음 구매 혹은 수량 할인을 통해 개별병원보다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하고 이 차액을 이윤으로 운영한다. 병원 입장에서는 구매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고 공급자 입장에서는 선구매를 통한 제조원가 절감을 기대할 수 있어 병의원·구매대행사·의료기기 공급사 모두 이득을 보는 선순환 체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국내로 들어와서는 소위 ‘가납’이라고 하는 선납제도로 변질되고 악용돼 공급자에게 병원 재고 부담을 전가시키고 사용량만큼만 계산서를 발행하게 된다. 문제는 이마저도 병원이 아닌 간납사가 치료재료 상한가를 이용한 계산서 발행만을 통해 통행세 형태의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또 다른 문제점은 판매상에 대한 관리 기준이 낮아 의무적으로 받게 돼 있는 품질관리 교육 이수만으로 영업을 할 수 있어 자격관리 차원에서 일부 유관단체에서 판매자 교육에 대한 의무화로 종사자 질 향상을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의료기기가 영세업자로 구성돼있다보니 기존 판매업자로서는 규제로 인식해 시행이 유보되고 있다.

이밖에 간납사와 같이 최근 제약에서도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는 CSO 역시 의료기기업계에 문을 두드렸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의료기기는 워낙 다품종 소량 생산이고 이윤 역시 제약에 비해 낮은 특성이 있어 대부분이 영세한 제조사 입장에서 판매전문 대리점과의 거래 여력이 없어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CSO가 의료기기분야에서 실패한 원인은 제약과 달리 판매 활동을 위한 제품별 시장 현황이 없어 판매전문 대리점이 고객 확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CSO가 시장 침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료가 특정 제품에 대한 제조사별 판매 자료인데 정보를 갖고 있는 식품의약품안전처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시장 접근 자체에 난항을 겪어 정착하지 못한 주요 원인이 됐다. 여기에 제약업계에서의 ‘리베이트 창구’라는 낙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관련법이 개정돼 CSO 역시 보건의료인에게 제공되는 금전적 이득을 게재하도록 규정이 바뀌자 CSO 대부분이 설 자리를 잃었다.

당초 CSO는 미국 제약 산업에서 신규시장 진입 시 초기 투자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위험도 분산차원에서 영업 관련 조직에 대한 외주화 수요가 있었고 이를 통해 초기 진입 비용에 대한 절감, 특정 전문치료군의 진입, 시장진입 시간단축 등 이득을 기대해 회사가 생겨났고, 다국적 제약사인 릴리가 2002년 출시약인 Duloxetine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 역시 시행 과정에서 리베이트 문제와 함께 사내 영업 전문성 축적이 불가하고 관리가 어려우며 회사 기밀유출 문제가 발생해 업계 전반에 CSO가 확산되지 못했다. 때문에 현재는 ▲Innovex ▲Inventive health Oncall ▲IQVIA 등이 부분적으로 CSO 영업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CSO와 판매업은 간납사와 판매업자와 같이 그 차이점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간납사의 경우 병원이 갖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중간에 대리점을 특정하고 모든 사용 물품에 대한 통로 역할을 하게 돼 있어 거래 형태로만 구분이 가능하다. CSO는 일반적인 판매업자가 특정 물품 판매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는데 비해 여러 제품을 동시에 취급할 수 있고 원 공급자와 판매 분에 대한 거래수수료 형식을 받지 않는 한 외견상 차이는 거의 식별하기 어렵다.

제약에서는 제약사 직판과 도매상 유통구조에서 중간에 CSO가 리베이트 창구 역할을 했지만 의료기기는 직판이나 판매상 형태가 모두 운영될 수 있어 특별히 CSO가 제도화될 필요는 없음에도 일부 도입을 원하는 업체는 기존 유통구조에 대한 변화를 통한 거래 기회를 잡고자 하는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국가보험체계를 갖고 있어 치료재료는 관리비용에 대한 상한가를 책정하고 있다. 시장에서 어떤 거래 형태를 가지던지 최종 환자 지불가격이 정해진 바 정부가 시장 유통까지 개입할 동기는 상대적으로 작다. 오히려 유통에 대한 개입은 수가를 낮출 수 있는 유인동기가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국민 입장에서 안전한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조에서 유통까지 최소한의 안전 기준이 정해지고 문제 발생 시 즉각적인 대처를 통해 피해 범위를 줄일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올해 7월부터 2등급 의료기기까지 판매이력과 함께 공급내역 또한 보고하게 돼 있다.

중요한 점은 강화된 의료기기 유통 기준에 대한 비용이 제품으로 전가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용 증가는 수익과 반비례하기 때문에 얼마 전 문제가 된 수익성 없는 제품의 시장 포기가 환자에게 피해가 전가되는 것을 막아야하기 때문이다. 유통구조는 단순해야 이상적이지만 의료기기는 품목이 다양해 제품마다 특성이 모두 달라 획일화할 수 없게 돼 있다. 창고나 관리자의 의무고용은 비용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효과는 없다. 결국 유통단계에서 안전성을 강화하되 비용이 늘지 않는 방법은 현재의 안정화된 체계를 유지하고 정부가 유통관리 부담을 공적 영역에서 일부 분담하는 것이어야 한다.

식약처 입장에서는 각종 보고·관리에 대한 전주기적 플랫폼을 만들고 의료기기업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추가적인 부담 없이 관리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적 교육을 늘려 누구나 전문지식을 획득하는 방법도 있다. 사무관 1명이 모든 관리를 담당하는 구조 역시 결국 업계 부담을 증가시켜 관리가 가지는 총량을 업계가 맞출 수밖에 없어 이에 대한 인적 지원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의료기기 유통구조는 특정 이해 집단이 아닌 공적 이익과 국민 안전성 보장 측면에서의 제도 개선이 먼저 고려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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