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건소에서 독감백신 접종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구청장이 집무실 창문으로 지켜보다가 독감백신 접종을 기다리는 대기자들 줄이 조금만 길게 늘어나면 불호령을 내린다. 요즘 거의 죽을 맛이다"

최근 만난 지방의 한 보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울상을 지으며 한 말이다. 

가을 독감백신 접종 시즌을 맞아 각 지자체 보건소마다 백신접종이 한창이다. 보건소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진풍경이다. 마치 부동산 분양시장이 호황을 누릴 때 길게 늘어선 청약 대기줄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현재 만성질환자나 만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1~3급, 기초생활수급자, 국가유공자 등은 무료로 접종을 받을 수 있다. 무료접종 대상자들은 혹시라도 보건소의 백신 확보 물량이 소진돼 접종을 받지 못할까 안달하며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노약자나 만성질환자 등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독감백신 접종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보건소에서 실시하는 독감백신 접종 상황을 보면 지방자치단체의 선심성 사업으로 '실적 채우기' 경쟁을 하는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 보건소 관계자는 "보건소의 독감백신 접종 대기자 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곧바로 구청에서 지적을 한다. 보건소 의료진이나 공무원 모두 거의 죽을 지경이다. 접종 대상자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다고 민원이라도 제기하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진다. 내년엔 또 지방선거도 있다보니…"라며 말을 흐렸다. 

일부 무료접종 대상자는 이중 접종을 받기도 한다.

"공짜로 접종하는 건데 두 번 접종하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이중 접종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건소나 보건지소에 그런 접종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지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독감접종 백신 때 추운 날씨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노인들이 혈관 수축에 따른 혈압 증가로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등의 혈관질환으로 쓰러지는 사례도 있었다.

질병관리본부는 "고령자는 쌀쌀한 날씨에 장시간 서서 대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하며 낮 시간을 이용해 접종하는 것이 좋다"며 "예진 시 접종당일 건강 상태와 평소 앓고 있는 만성질환을 의료진에게 꼭 알려야 하고  예방접종 후에는 30분 정도 보건소에 머물면서 급성 이상반응(쇼크증상) 발생 여부를 관찰한 후 귀가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지만 접종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

보건소나 보건지소에 근무하는 공보의들은 백신접종 시즌이 두렵다. 공보의 한 명이 많게는 하루에 수천 명을 상대로 접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의사의 예진이 제대로 이뤄질리 만무하다. 접종 전에 시진과 문진, 발열 검사 등을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다간 몰려드는 접종 대상자를 감당할 수 없다. 결국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이면 접종부터 하고 보자는 식이다. 

공보의들은 "독감 예방접종에 있어서 절대 금기라고 할 수 있는 발열 여부 검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자칫 의료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감백신 접종을 하는 목적은 국민 건강과 공중보건 향상을 위해서다. 현재 보건기관에서 실시하는 집단적 독감백신 접종이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라포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